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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H Nov 14. 2019

벅찬 일상에 익숙해져 가며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학교생활을 시작하며 눈치코치로 하나 둘 로스쿨에 관한 많은 것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로스쿨에서 학년은 1L, 2L, 3L로 불린다. 한국에서는 입학한 연도가 기준이 되어서 ‘나는 09학번’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하는데 미국식은 달랐다. 예를 들어, Class of 2018이라고 해서 졸업할 연도를 기준으로 학생들을 묶어서 계산했다. 나는 ‘2년 JD’ 과정을 선택해서 이 학교에 2L로 편입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는 2L이어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Class of 2017이었지만, 커리큘럼에 따르면 나는 첫 일 년 동안은 Class of 2018 학생들과 같이 1L 수업을 들어야 했다. 입학도 Class of 2018 학생들하고 같이하고, 수업도 같이 듣고, 생활도 같이하니까 첫 일 년 동안은 자꾸 나도 1L인 줄 알고 헷갈려하며 지냈다.


친절하게도 로스쿨은 1L이 들어야 할 기본적인 수업을 정해서 시간표를 짜주었기 때문에 시간표에 대한 걱정 없이 첫 일 년을 보냈다. 1L은 A, B, C 반으로 나뉘어 한 반에 보통 50명 정도 배정이 되어서 같이 수업을 들었다. 나는 C반에 배정되었다. 첫 학기 동안 C반의 친구들이 모두 한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것은 우리 C반 시간표가 제일 나빴다는 것이다. 수업은 한 번에 2시간 정도로 듣고, 학점에 따라서 일주일에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수업을 듣는 게 A반, B반의 시간표라면, 우리 C반의 시간표는 특별했다. 우리만 Contract수업이 화, 수, 목, 금요일에 매일 있었다. 그것도 아침 8시에 매일 한 시간씩! 내가 고3 때 이후로 이렇게 이른 아침에 수업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로스쿨생이라면"


이런 기막힌 시간표를 만들어주신 부지런한 분들 덕분에 학기 초에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유익한 버릇을 들였다. 점점 한주 한주 시간이 지나면서 내 몸은 다시 내 페이스를 되찾았고, 역시 걱정했던 대로 종종 늦잠을 자서 눈 뜨자마자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5분 컷으로 달린 적도 많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데 교수님 말씀도 못 알아듣겠고 그 짧은 한 시간 수업도 버티기가 힘들어서 맨 앞자리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우리 C반을 너무나 사랑하신 그분들께서는 점심시간 직후에도 수업을 배정해주셨다. 점심 직후 수업은 C반 안에서도 더 적은 인원으로 반을 나눠 작은 강의실에서 들었다. 작은 강의실에서는 모두의 행동이 더 눈에 띄는 것을 알았지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내 몸은 대담하게도 수업 때마다 가운데 앉아서 정신을 못 차리고 숙면을 취했다.


내 앞에 놓인 책은 어려운 말투성이었고, 교수님 강의는 알아들을 수 없었으며, 영어 단어 찾겠다고 하루 종일 내 carrel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니까 체력이 떨어졌고, 아마도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까지 더해졌던 것 같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로스쿨 생활은 커피의 쓴맛이 싫어서 수능 준비할 때도, 대학 다닐 때도, LSAT 공부할 때도 커피를 마시지 않고 공부를 해왔던 나를 굴복시켰다. 이제서야 왜 모든 로스쿨생들이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로스쿨 학생들이 강의실에 들고 다니는 필수 아이템들은 노트북, 책과 노트, 그리고 커피가 담긴 텀블러다. 로스쿨에서 웰컴 선물로 주신 예쁜 빨간색 텀블러를 나는 학교 식당에서 나오면서 입가심으로 달달한 음료수나 가득 받아오는 용도로 사용하곤 했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그 텀블러를 준비해주신 분들의 의도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로스쿨에서 살아남으려면 커피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나도 하루 종일 커피를 가득 담은 텀블러를 한 손에 들고 다니는 진정한 로스쿨생으로 거듭났다.


로스쿨 건물 1층에는 학생들을 위해 커피머신과 다양한 맛의 커피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다. 아낙네들이 우물가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던 것처럼 수업 직전에는, 특히 아침 Contract 수업 전에는 항상 여러 명이 커피머신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도 커피머신 죽순이었기 때문에 커피머신 앞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커피머신이 있는 좁은 공간은 얼굴만 알던 친구들과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하고, 정보 교류도 하는 아주 좋은 터가 되었다.


커피 죽순이는 커피머신으로 다양한 커피들을 도전해본 후 쓰지 않은 커피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커피 맛 한 봉지와 핫초코 맛 한 봉지를 섞어 간신히 흘러넘치지 않을 정도로 텀블러에 가득 담아  먹는 나만의 커피 맛을 개발했고, 커피를 물 마시듯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는 아무리 지루한 강의에서도 잠에 굴복하지 않게 되었다.


"깔았던 철판이 무너지더라도"


학기가 끝날 때까지 강의 시간에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제일 괴로웠던 순간은 다른 어떤 순간도 아닌 수업 중간에 교수님이 농담하실 때였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내가 무슨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교수님께서 그냥 말씀하실 때는 모두들 가만히 앉아 교수님 이야기만 잘 듣고 있으니까 누가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도 당황하지 않고 교수님을 쳐다보며 때때로 고개 끄덕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너무 가만히만 있던 것 같다 싶을 때는 진지하게 필기하는 듯한 얼굴로 노트에 수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들을 한글로 써 내려갔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진짜 못 알아먹겠네.'

'다들 내가 필기하는 줄 알겠지.'

'메롱'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학생들이 동시에 웃기 시작하는 그 처음 1초는 같은 공간에 있는 나와 그들이 눈에 띄게 분리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뒤에서 친구들이 일제히 빵 터지는데, 나 혼자 아무 반응 없이 앉아있을 때의 창피함이란... 나는 제일 앞자리에 앉아있었으니 교수님께서 웃긴 멘트를 쳤을 때 타이밍에 맞춰 못 웃는 게 당연히 티가 났다. 1초 뒤에 웃는 척하는 게 더 자존심 상해 친구들과 교수님이 빨리 웃음을 그치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내 눈앞에 있는 노트북만 쳐다보거나 교수님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유머 따위 하나도 웃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는 으레 그렇게 쉽게 웃지는 않을 거라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인상도 썼다. 못 웃는다는 건 교수님의 말을 이해를 못 한다는 방증이었으니까 수업 시간에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면서 강의하는 교수님이 제일 싫었다. 수많은 1초 들을 견딜 때마다 항상 속으로 나는 언제쯤 영어를 이해하고, 미국인들의 유머를 이해해서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멘트칠 때 제일 먼저 빵 터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신나게 웃고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다행히도 여름이 다가올 때쯤, 맨 앞자리에 앉은 유일한 아시안 여자애는 교수님의 유머에 누구보다도 먼저 빵 터지는 학생이 되었다.

 


"공포의 Call on"


로스쿨 수업에는 ‘call on’이라고 교수님께서 한 학생을 호출해서 반 전체 학생들 앞에서 질문에 대답을 시키는 특별한 문화가 있다. 그쯤이야 대학 다닐 때 친구들한테, 선배들한테, 로스쿨 관련 진학 상담을 하러 여쭤봤던 교수님들께도 들어 봤던 익숙한 단어였다. 모두들 로스쿨 수업의 특별한 점은 수업 시간에 하는 ‘call on’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이 ‘call on’의 부담 때문에 수업 준비를 소홀히 해갈 수가 없다. 언제 교수님이 출석부를 넘기면서 누구의 이름을 호명할지 모르니까.


다행이랄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첫 학기 때는 주요 3과목 수업 중에서 제일 어려운 과목이라고 소문난 Civil Procedure를 가르치신 교수님만 ‘call on’을 하셨다. 나는 Civil Procedure 첫 수업에 들어오시는 교수님을 보고 자연스럽게 대학 때 전공 교수님을 떠올렸다. 외양적인 모습부터 학생들 대하는 모습까지 전공 교수님이랑 비슷했다. 이 교수님도 키도 크고 덩치가 컸고, 수업을 가르치는 방식이나 학생들을 대하는 모습에서 선하고 인자한 모습이 뿜어져 나왔다.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call on’을 하실 때가 제일 무서웠지만 ‘call on’을 했을 때도 인자한 태도로 계속 학생이 대답을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수업 끝나고도 학생들에게 질문이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앞으로 나와서 물어보라고 격려해주셔서 특히 이 교수님 수업은 끝나고 학생들이 강단 앞으로 나가 줄을 길게 서는 편이었다. 교수님께서 특별히 수업 끝나고 앞으로 나와 질문을 더 해도 된다고 하셨던 영향도 있지만, 이 과목이 어려워서 그랬던 영향도 컸다. 이 과목은 민사소송의 절차에 관한 과목이어서 복잡했다. 미국 법원 시스템이 크게는 연방법원과 주 법원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체계이기 때문에 처음에 배울 때 케이스마다 어느 지역에서 그리고 어느 법원에 소송을 걸 수 있는지 등이 많이 헷갈려서 학생들이 제일 어렵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call on’이 무서웠던 건 그 공간이 교수님과 나만의 공간이 아니라 내 대답을 듣고 있을 다른 몇십 명의 친구들 때문이기도 했다. 버벅거리지 않고 한 번에 대답을 잘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변 시간은 끝이 나지만 보통은 교수님께서 그 대답에 이어 더 깊은 몇 가지 질문들을 추가로 물어보시기 때문에 교수님의 모든 질문에 멋있게 다 대답을 한다는 건 어려웠다. 모든 친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call on’을 두려워하고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아마 그중에서 교수님이 질문한 뒤 출석부에 있는 이름을 눈으로 훑는 그 잠깐 몇 초 동안 제일 간절하게 내 이름은 발음이 어려워서 교수님이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빌고 있던 학생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C반에는 외국인 학생이 3명 정도밖에 없었고, 교수님은 미국인 학생 이름만 잘만 부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수업마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교수님께서 첫 수업 때, 이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누구든 최소 한 번은 ‘call on’을 당할 거니까 모든 수업 준비를 잘해오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미래를 알려주신 교수님 덕분에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내 차례에 항상 긴장하며 열심히 책을 읽어가고, 'case brief'를 읽어가며 준비해 갔다.


힘겨운 첫 주를 끝낸 금요일. 언제 불릴지 모르는 공포감이 가시지 않아 날이 밝아올 때까지 고민하다 내 career advisor의 조언대로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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