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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20. 2020

언론 유감

나약한 언론 기자들

내가 언론사 기자를 처음 실물로 본 것은 직장 초년 시절 회사 사무실에서였다. 오후 2시경으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커다란 카메라 ( 나중에 보니 ENG 카메라 )가 보여서 테레비 방송 기자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중 한 사람이 벽시계를 배경으로 마이크를 잡고 서더니 '지금은 밤 10시, 그러나 수출 역군들은 사무실을 대낮같이 밝혀 놓고...' 사무실 벽시계의 시침은 10 시로 돌아가 있었다. 그로부터 수년 후 우연히, 막아서는 경비원을 거칠게 밀치고 우리 회사 회장실로 몰려가는 후줄근한 옷차림의 남자들을 보았다. 재정이 악화되어 회사가 언론에 오르내릴 때였다.


두 경험에서 내가 느낀 것이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시계를 돌려놓는 정도의 눈속임은 애교로 봐줄 수 있었고, 남의 회사 사무실을 무단으로 출입하는 것도 감춰진 진실을 캐내서 알려야 하는 기자의 패기로 보였다. 기자는 그 대신 먹잇감을 보고 달려드는 사자처럼 철저히 파헤쳐서 사회의 감시자로서 역할을 다 해주면 되었다. 그러나 요즘 무관의 제왕인 언론 기자들의 허약한 행태를 목격하며 종종 답답할 때가 있다.


예전엔 출근길 차 안에서 라디오 시사 대담 프로를 듣곤 했다. 진행자는 능구렁이 정치인과는 잡담 비슷이 설렁설렁하다가도, 공무원이라도 걸려들면 무자비하게 윽박지르는데 듣고 있으면 죄 없는 나까지도 움찔하였다. 방송에서 말 한마디 실수하면 평생 봉직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불명예스럽게 떨려 날 수도 있는 판에 닦달한다고 무엇이 나오겠는가? 그건 취재가 아니고 취조다. 우위에 있는 자가 상대방에게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갑질이다. 갑질은 비생산적이고 실익이 없다. 제왕에게 주어진 힘은 힘 있는 자를 향해서 행사돼야 한다.


수년 전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서 주관한 기자회견 말미에 특별히 한국 기자들에게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나서는 기자가 한 명도 없었다. 보다 못한 오바마가 한국어로 물어봐도 된다고까지 하며 둘러보았건만 결국 얄미운(?) 중국 기자가 기회를 채가고 말았다. 천하에 꿀릴 게 없다는 대한민국 기자들이 멍석을 깔아 주는데도 놀지 못한 흑역사다. 


백악관 기자 회견에서 미국 주요 방송사의 중진 기자가 마이크를 빼앗겨 가며 미국 대통령과 '맞짱' 뜨는 장면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나라 대통령 기자회견 (자주 하지도 않지만 )은 거창한 행사 같다. '행사'를 주관하는 청와대 참모가 오늘 회견의 질문 내용은 미리 정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모습이 매우 후진적이다. 연회장 같이 널찍한 회견장에 모여 앉아 '덕담'을 주고받던 중 어쩌다 대통령에게 거북하거나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기자가 있으면 그 자체가 기사가 되고 무례한 기자라고 지탄받는다. 나이가 어린 기자에게는 당돌하다는 평까지 추가된다. 우리나라 기자들이 제대로 된 기자회견에 익숙할 수 없는 환경이다.


어느 외신기자가 자기네들은 취재를 위하여 점심 식사를 선호하는데 한국 기자들은 저녁 자리를 좋아하더라고 비꼬던 게 생각난다. 대부분의 비중 있는 기사가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서 취재되고, 경륜있는 기자는 기자회견을 등한시하고 회견의 질은 떨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기자회견도 취재 전선의 일선이고 일선엔 노장이 나서야 한다. 내가 잘 못 봐서 그런지 몰라도 기자 회견장에 노장 기자는 안 보인다. 미국의 기자 회견장에서는 백발의 노기자가 접이식 의자에 앉아 송곳 같은 질문을 해대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정치인이나 정부 관리 등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취재 대상을 기자들이 길거리나 복도에서 붙들고 실랑이하는 장면은 이제 생동적이지도 않고 싫증이 난다. 가급적이면 그들과도 수시로 기자회견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율적이다. 멍석을 펴고 제대로 놀자는 얘기다.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기자가 매달리듯 쫓아가지 말고 당당하게 한 군데에 마이크를 세워 놓고 발언자가 스스로 말하고 질문을 받게 하면 약식 회견이 된다. 그러면 기자도, 말하는 사람도, 시청자도 덜 피곤하다. 어차피 말하기 싫은 사람은 매달려도 안 한다. 혹시 신임 기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취재원에 육탄으로 돌진시키는 거면 시청자들 안 보는 데서 했으면 좋겠다. 


'검찰 조사에 성실히 임하겠다'라는 판에 박힌 중얼거림 ( 안됐지만 기관에 출두하는 사람들도 다른 말을 좀 개발해서 썼으면 한다. 허구한 날 '성실히 임하...') 한 마디 들으려고 검찰청 앞에 진을 치고 버티는 기자들을 보면 참 낭비적이란 생각이 든다. 경찰서에서 끌려 나오면서 포악을 부리는 흉악범은 시청자들에게 해악한 장면이다. 얼굴을 싸매고 수갑을 찬 그들에게서 도대체 어떤 가치 있는 정보와 그림을 기대하는가? 


압수 수색한 파란 비닐 박스들을 들고 나오는 검찰 직원을 따라가면서 뭐냐고 물어보는 기자들을 보면 한심하다. 들고 나오는 파란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얘기해주는 수사관을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냥 압수수색 (물어보지 말고) 영상만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안 그래도 압수한 박스들을 승합차 좌석에 억지로 꾸겨 넣는 걸 보며 짜증이 나는 판에 (요새 용도 별로 차종도 많은데, 경찰과 검찰은 압수한 박스들을 나르는데 적합한 차량을 준비했으면 한다.) 하나마나 한 질문을 해대는 기자들이 참 안타깝다. 어쩌다 한 건 걸릴까 노리는 건가? 눈먼 고기는 은퇴한 낚시꾼이나 기다린다. 


북한 김정은이 한동안 공식 석상에 안 나오니 변고가 있는 것 같다는, 번번이 헛다리 짚는 북한 동향 기사도 같은 과다. 북한은 어차피 폐쇄된 사회이고 미리 몰랐어도 언론으로서 큰 흉이 안된다. 한두 번도 아니고 괜히 우리 국민까지 실없는 사람들로 만드는 근거 희박한 추측 보도는 이제 그만하자. 정말 의욕이 있으면 목숨 걸고 북한에 잠입해서 세기의 취재를 해오든지...


언론은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뉴스 장면은 줄이고 내용적으로 취재의 질을 향상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단편적인 제보나 첩보를 실시간으로 터뜨리는 '단독'보다는, 호흡을 길게 잡고 사회에 중요한 문제나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폭로하는 것이 특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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