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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21. 2020

술 권하는 사회 2020


술을 몇 년 끊은 적이 있다. 과음하고 집에 오다 노트북 컴퓨터를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당하고 나서였다. 다음날 아침 다행히도 빌라 경비실에서 피시를 찾기 전까지 전전긍긍했다. 회사 업무용 피시여서 더 그랬다. 나는 그 충격으로 스스로 나의 음주 면허를 취소했다. 자격 미달로 인한 면허 자진 반납이자 망동에 대한 응징이기도 했다. 초범이었지만 워낙 죄질이 무거워서 무관용 원칙을 적용해서 즉결 처리했다.





과거에 나는 술자리에서 종교, 체질, 한약 등등 무슨 이유든( 임신을 제외하고 ) 간에 술을 사양하는 자들을 증오하고 적잖이 괴롭혔다. 좀 가까운 사이면 치유 요법을 병행하면서 구원의 손길도 내밀었다. 학교 다닐 때 술이 약했던 한 친구에게는 일주일에 소주를 한 병씩 지급하고 매일 자기 전에 한 잔씩 마시도록 권한 적도 있다. 소주 한 병에 (작업 도중에 흘리는 손실률을 감안하면) 오십 씨씨 소주잔으로 일곱 잔 정도가 나오므로 일주일 치 처방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친구 주량은 그대로인데, 환자에게 의사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백약이 무효라는 걸 웅변한다.



술을 끊은 후에도 술자리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입장과 처지가 바뀌고 보니 우리 사회의 음주 습관을 맑은 정신으로 체험하는 고苦로운 기회가 되었다. 술자리에 낄 때마다 '비주류 (술 안 마시는 그룹)'가 모여 앉은자리를 기웃거리다 주류에 적발되어 원위치되기 일쑤였다. 그러고 나서 술잔을 엎고, 그 이유에 대해 추궁당하고, (하도 많이 얘기해서) 정제된 대사를 읊는 순환을 시작한다. 하지만 십 분도 채 되기 전에 다시 동일한 질문과 동시에, 그럼 무슨 재미로 사냐는 반문이 끝없이 이어졌다.



맹숭맹숭 앉아 있으니 전에 몰랐던 술자리의 타성이 드러났다. 같은 얘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데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처음 듣는 얘기처럼 주억거린다. 더욱 못 견디겠는 건 자리를 끝내고 일어날 듯하다 누가 한 병만 더하고 바람 잡으면 주저앉거나 노래방 서비스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도 지겨워 시계를 쳐다보았더니 술맛 떨어진다고 욕을 하는 놈도 있었다. 그 시간이 새벽 1시 반이었다. 어찌어찌해서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갈 때가 돼서 내가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된다고 대리 부르라고 난리다. 한 방울 안 마셨다고 해도 고개를 갸웃한다. 열 번에 아홉 번은 그랬다, 연구 과제다. 아마 술자리에선 뇌가 쪼그라들어 기억이 십분 이상 지속이 안되는가 보다. 과거의 나의 만행을 미루어 짐작하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뀐 상황에서 성인의 말씀을 재확인할 뿐이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성경 갈라티아 6:7


자공왈 아불욕인지가저아야 오역욕무가저인 자왈 사야비이소급야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를 吾亦欲無加諸人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자공이 말했다. 저는 남이 나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저도 남에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야 이것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논어 공야장 / 낭송 논어 ( 김수경외)



술은 일 인분을 혼자 후루룩 해치우는 짜장면 방식이 아니고, 해물 찌개처럼 여럿이 나누어 먹으면서 공동으로 소비한다. 찌개는 마지막에 남은 생선 왕건이 한 토막을 서로 사양하다가 끝내 놔두고 일어서지만, 술은 떨어지기 무섭게 빈 병을 삼십 센티 치켜올리며 호기 있게 한 병 추가를 선언하는 게 다르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분배에 있다.



분배(요새는 병권甁權이라고도 함)의 기준이 각자의 음주 의욕이나 주량이 아닌 술잔의 상태에 있다. 본인 아닌 다른 사람이 비어 있는 술잔을 채우는 방식으로 집행하는 것이 특색이다. 따라서 빈 잔이 방치되지 않도록 수시로 단속하는 건 참석자 모두의 본분이다. 이걸 게을리해서 누가 기다리다 못해 자작이라도 하면 나머지 일행은 마누라 생일이래도 놓친 듯이 화들짝 놀라며 겸연쩍어한다. 요새는 옆 사람한테 카톡이나 문자로 완곡한 경고를 날리기도 한다, 지금 바쁘냐고( 술을 따라 주지 못할 정도로 ). 베토벤이 이 경고를 무시했다 따귀를 맞고 청각을 잃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음주 예절이다. 이런 부담은 장시간 정체되고 있는 술잔의 주인에게 순환을 강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균형을 이루게 된다. 술잔은 수시로 채우는 첨잔 (replenish)이 아니고 잔이 비어야 비로소 채우는 한잔 더 (refill) 방식이기 때문에, 잔의 주인은 상대방이 상향 45도 위협적인 각도의 술병으로 급소(목젖)를 겨냥할 때 잔을 비우는 수밖에 없다.



다른 음식과 달리 상대방의 신체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술을 강권한다. 이는 할머니가 배부른 손자에게 계속 무언가 먹이는 것과는 다른 행동 양식이다. 다 같이 마시고 망가지자는 단체 행동에서 이탈하는 배신행위를 경계하는 동기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술을 매개로 서로 영혼을 한 겹씩 벗겨가는 의식에서 혼자 버티는 걸, 목욕탕에 옷 입고 들어가는 얄미운 이기적 행위로 볼 수도 있다.






음주 문화는 고금동서古今東西가 다르다. 적어도 술을 강요하는 관습이 우리 민족의 미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선조들은 인격이 드러나는 술자리 법도를 경건한 향음주례 鄕飮酒禮에 의거 엄숙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가 음주에 관대했다는 사실도 주종酒鍾을 참고해서 이해해야 한다. 조선 중기 이수광이 조심하라고 한 소주를 우리는 오늘날 물처럼 마시고 있지 않은가?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의하면 '소주는 몽골에서 왔는데 약으로나 쓸 뿐이지 함부로 마시면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작은 잔을 소주잔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며,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소주는 예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다. 원나라 때에 처음 빚는 법이 알려졌다.'라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주와 아르히[архи]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미국은 우리보다 알코올에 대해 엄격하다. 술을 먹을 수 있는 나이도 우리나라가 19세인데 비해 21세 ( 텍사스 주인가 어디 한 군데 제외하고)로 높다. 18세에 입대해서 음주를 못 하는 군인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미국에서는 미성년자가 술을 사는 게 마약 구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술은 암 시장이 없다. 지역 별로 주류 판매 규정이 다르고 까다로워서 술 안 파는 슈퍼도 꽤 많고 술 전문점에서는 신분증을 철저히 검사한다. 오십이 넘은 나한테도 번번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내가 동안이라서가 아니라 동양 사람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한다. 역逆으로도 마찬가지.) 미국은 몇 개 주를 제외하고는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술 마시면 걸린다. 알코올에 대한 규제 수준은 우리가 도입해서 나쁠 게 없지 않을까 한다.



나는 술을 끊은 지 6년여 만에 다시 시작했다. 이유는 불편함이었다. 담배와 달리 술은 음식이므로 내가 가리면 채식주의자처럼 다른 사람이 불편해 함을 느꼈다. 더욱이 노트북 분실 같은 이유를 대면 생명 연장의 야욕으로 간주하고 축복 ( blessing) 은커녕 저주도 하고 독하다는 소리까지 했다. 사실은 반대다. 독한 사람 또는 의지가 굳은 사람은 뭐를 안 끊는다. 적절히 통제하면 된다. 그게 안 되는 나 같은 의지박약자나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술을 끊은 동안에 술자리에 갈 때마다 특별한 날이었고, 그래서 오늘은 예외적으로 한 잔 정도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매일 특별한 날을 살고 있다.



현진건은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술이 땡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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