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화명이地火明夷
1980 년대 말에서 90 년대 초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있었다. 천안문 사태의 무력 진압에 대해 국제 여론은 부정적이었고 소련이 해체된 후 체제 정당성에도 위협을 받았다.
이에 당시 실권자였던 등소평이 내놓은 지도 방침이 그 유명한 도광양회 韜光養晦, 유소작위 有所作爲다. 재능을 감추고 실력을 기르며 꼭 필요한 일만 하자는 전략이다.
도광양회[ 韬光养晦 ]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른다’는 의미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덩샤오핑 시기 중국의 외교방침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성어(成语)로서 도광양회는 청조(清朝) 말기에 사용되었다. 이후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이끈 덩샤오핑이 중국의 외교방향을 제시한 소위 ‘28자 방침’에 사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광양회 [韬光养晦] (중국현대를 읽는 키워드 100, 유희복)
有所作爲(한자)중국 고전 <맹자(孟子)>에서 유래했으며, 사람이 뭔가 일을 해서 비교적 큰 성과를 거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강력해진 국력과 영향력에 걸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소작위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영토분쟁에 있어서도 등소평은 경제개혁을 강조하며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자세를 취하며 분쟁을 보류하였다.
구동존이(求同存異)는 “공통점을 구하고 차이점은 놔둔다”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협상 전술이다. 이 전략은 1955년 당시 중국 부주석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가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유래했다. “큰 틀에서 상대방도 나와 같은 생각이니 지엽적인 문제는 뒤로하고 공통점을 찾아 먼저 진행하자”는 이 말은 그 뒤로 중국 외교 제1원칙으로 준수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동존이’를 영어로 뭐라고 할까? - agree to disagree (인문학은 언어에서 태어났다, 2014. 12. 8., 강준만)
그 후 정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경제 발전엔 박차를 가해 중국은 어느새 세계 제2 경제 대국이 되었다. 미국이 화들짝 놀라 어떻게 해보려고 애쓰지만 간단하지가 않다. 총 GDP가 12조 달러를 넘어 세계경제의 15%를 점하는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을, 미국으로서도 제살 깎기를 어느 정도 감수하지 않고는 손보기가 어려워졌다. 일단 등소평의 전략은 성공한 셈이다.
주역周易의 지화명이地火明夷 괘는 땅坤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있어 밝음이 땅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밝음이 상처 받고 땅속으로 들어가니 암울하다.
같은 개념의 '용회이명 用晦而明' 은 어둠을 써서 밝음을 지킴, 즉 어려움을 알고 드러나지 않게 몸을 굽히고 조용히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는 지혜다. 주나라 문왕文王이 은나라 말 폭군 주紂왕에 의해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초연하게 화禍와 환患을 멀리한 도道라고 전해지고 있다.
등소평을 주나라 문왕과 같이 놓을 수는 없으나 그의 전략 도광양회는 문왕의 용회이명과 닮았다. 난관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도전하는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졸렬할지 몰라도, 무모하게 덤비는 대신 주어진 명命으로 알아서 피하고 때를 기다리는 동양의 철학을 용회이명에서 읽는다.
한편 서구 주도의 시장경제를 수용하며 경제력을 키운 중국은 이제 중화의 자존심을 숨기지 않고 서구의 오만함에 맞서기 시작했다. 후진타오가 통치이념으로 내건 화평 굴기를 시진핑이 중국몽으로 이어받아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고 있다.
2010년 대에 들어서서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필리핀, 베트남 등과의 해양 영토 영유권 분쟁에서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 별안간 밝음이 어둠을 밀어낸 듯 소매를 걷어 이두박근을 과시하는 치기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가져오기 충분하다. 무려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팽창정책을 쓸 때 주변 지역은 긴장하게 되며 이에 따라 물리적 충돌의 확률도 높아진다.
그러나 중국의 밝음은 아직 땅속에 숨어 있다. 경제발전을 통해 중국인들의 평균 소득이 만 불에 육박하지만 도시 중심의 성장 정책으로 인해 도농都農간 빈부 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져 있다. 중국 농민의 소득은 도시 사람의 30%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풍부한 노동력으로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정부의 성장 정책과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충돌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다.
노동자 농민들이 권리 신장을 위해 연대하고 행동할 경우 천안문 사태와는 다르게 인민 해방군이 제압할 수 있는 위세를 넘어설 수 있다. 민중의 팽배한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는 지배층의 부패가 제공할 것이다.
역사가 말해준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농민 봉기 이자성의 난도 당시 조정 대신들의 부패가 촉발시켰다. 중앙권력이 정치를 독점할 때 부패는 당연지사다. 국가가 국민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일당 독재의 수직적 권력 구조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러한 문제들을 풀 수 없다.
중국의 민주화는 순리이면서 필연적이다. 지배층이 나서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혁명적으로 민주화를 서두르지 않을 경우 민중이 피를 흘리며 세상을 바꿀 것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동양철학 종주국의 정예답게 역사의 맥락에 순응하여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래야 땅속에서 빛이 솟을 때 동반해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중국으로서 용회이명을 완성하고 당당하게 국제사회에서 대국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그렇지 않고 권력자들이 지식인들과 결탁하여 인류 보편의 가치인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고 역사 발전을 외면하면 훗날 중국 땅에 밝음이 떠오를 때에도 그들은 어둠 속에 머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