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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25. 2020

저도 제주에 한 번 가 봤습니다.

작은 책방이 작은 작가를 살릴 수 있다면

서귀포 김영갑 미술관에 전시하고 있는 사진




브런치엔 제주도에서 올린 글들이 꽤 많이 올라온다. 제주를 배경으로 한 브런치 글의 비율이 우리 일상에서 제주가 차지하는 비율보다 높은 이유가, 남프랑스 프로방스에 화가들이 많이 몰린 것과 통하지 않을까 하면서 제주로 향했다. 모임에서 오랫동안 별렀던 제주 여행이었다.


십여 년 만에 제주 공항에 도착한 느낌은 예전에 미국 LA 공항에 내렸을 때와 비슷했다. '여기는 노는 데 구만' , 온화한 날씨와 살랑거리는 바람으로 눈 감고도 휴양지임을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나오는 데, 전에 브런치에서 읽었던 글 '몽캐는 책고팡, 사랑스러운 제주 전통가옥 책방' 이 불현듯 생각났다. 브런치 작가 Erin and you https://brunch.co.kr/@erinandyou 님이 한 달 전쯤에 제주 애월의 작은 책방에 대해 쓴 글이다. 마침 우리 일행의 숙소도 애월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하면서 티맾에다 쳐보고, 안 나오네... 하는 데 옆 사람이 20분 정도 걸린다고 선언한다. 검색이 실력인 세상이다. 마침 날씨도 묵직하고 책방 가기 좋은 날이다.


책방은 찾았는데 미닫이 문에 빗장이 밖으로 걸려있고 동네는 조용하다. 그런데 책방 앞에 나뭇판 '문엶' 이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OPEN'보다 2만 배 더 빨리 읽힌다. 나무 판은 젊은데 글과 글씨가 고색창연하다. 갑자기 내가 살아보지도 않은 6.25 때 부산 국제 시장으로 필름이 초고속으로 되감긴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를 만나 뵌 듯 정겹다. 책방 주인이 아버지뻘 어르신일 거라는 선입견이 작렬한다. 전통 고가옥을 개조해서 만든 책방이 그 추측에 대못을 박는다. Erin and you 작가님이 올린 글에서 책방 주인이 젊은 애기 엄마라고 설명했던 기억은 이미 자의적으로 삭제되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나라 가게마다 걸려있는 'OPEN'을 어찌해야 '문엶 '으로 갈아 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가지를 친다. 살면서 처음으로 독재 권력이 아수어지는 순간이다.


(나의 독단적 짐작에 의하면 ) 아무리 능통해도 외국어는 일단 (당구로 치면) 한번 쿠션을 먹고 들어 오기 때문에 모국어와 비교해서 시각에서 해독까지 미세하나마 시차가 있다. 0.01초라고 하더라도 5천만이 하루 한 번이면 상당한 시간 낭비가 된다. 게다가 'CLOSE' 간판까지 치면 심각하다. 보는 사람이 다 착한 사람들이라서 일일이 '닫으라'라는 명령문에 따라 문을 닫아주면 시간은 몇 배로 뛴다.


close (문커튼 등을) 닫다,
closed 닫힌
네이버 사전


'빗장 걸린 책방 문'과 '문엶', 2종의 충돌하는 정보를 가지고 고민한다. 밖으로 잠겼으니 두드려 봐야 소용없다. 가능한 시나리오는, 문을 닫으면서 '문엶'을 '문닫힘'으로 바꾸는 걸 주인이 잊었을 수 있다. 우리 동네 김밥 집도 그런다. 24 시간 'open'인데 아침 9시 15분 돼야 문을 연다. 안에 사람 있어도 안 열어준다.


포기하고 뒤로 돌아서는 순간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세기적인 발견을 한다.



책방 유리창 안 쪽에 있는 또 하나의 알림판을 간과한 이유는 난해한 문구에 있었다. 일행 중에 제주 태생 친구가 이 암호 같은 '문·영·동·경넉 자를 해독해냄으로써 우리 일행은 자신 있게 빗장을 벗기고 책 방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문을 이렇게 당겨서 들어오세요'  

통역이 필요한 곳, 제주도는 해외가 맞다.


문=문
영=이렇게
동경=당겨서
들어옵써 = 들어오세요







안에 들어서니 또 하나의 알림이 책방 마루에 서있다.

제주 와서 2박 3일 마치고 가는 날 가장 제주스러움을 체감하는 순간이다.


무인 서점이다. 이게 제주의 인심인가, 아니면 제주가 품고 있다 살짝 내놓은 우리 민족의 옛 전통인가. 밖에는 바람이 부는데 책 방 안이 더욱 훈훈해진다. 무인 가게에 들어서면 난 괜히 조심스러워진다. 주인으로부터 신뢰받는 고객으로서 잘 처신해야 한다는 소심함에서 동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도 잘 안 간다.


그때 문밖이 약간 소란해지면서 주인장의 어머니를 자처하시는 분이 등장해서 통화 중인 전화기를 건네주신다. 주인장과 통화한 집사람 말로는, 집에 어린 아이들 때문에 못 나온다고... 천천히 보고들 가시라고. 


책 두 권을 골라서 옆에 있는 공책에 적기는 했는데 계좌번호가 안 보이네. 누군가 '인스타' 나무 판을 돌리니 계좌 번호가 적혀있다. 상상하는 만큼 보인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필시 '문엶' 판도 뒷면으로 돌리면 문 닫힘 같은 표시가 있었을 텐데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쉽다. 하나 가르쳐주면 겨우 하나 아는 게 한계다.


'몽캐다'는 제주 방언으로 느릿느릿 꾸물거리다는 뜻이고 '고팡'은 제주 방언으로 식품이나 물건을 보관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Erin and you https://brunch.co.kr/@erinandyou





그러고 보니 제주에는 작은 책방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내게는 작은 책방과 독립서점의 개념이 분명치 않다. 교보문고 같은 거대 자본의 개입 없이 책방 주인이 개성 있게 운영하는 서점이 아닌가 나름대로 정의해 본다. 상업적인 구별이다. 독립 출판물만 취급하는 뼛속까지 '독립'인 독립서점도 있다고 얘기는 들었다.


번화하지 않은 주거지역에 책방을 열어서 동네 책방이 되고, 규모도 작아서 작은 책방이란 정겨운 이름으로 불리지 않을까? 요즘 '작은'이라는 형용사가 반드시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닌 추세라 다행이다.


그렇다고 독립 서점이 다 작은 건 아니다. 미국 서부 오리건 주 포틀랜드 시내에 있는 '파웰스 서점'은 독립서점이면서도 무지X2 하게 크다 ( 'Independent'가 그 '독립'이라면 말이다. ). 시내의 한 블록을 다 차지하고 있어 들어가면 안에서 길을 잃을 정도다. 아마존을 통해서도 팔았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다. 실물 책방인데도 아직은 잘 버티고 있다.


Powell's Books | The World's Largest Independent Bookstore www.powells.com

Shop new, used, rare, and out-of-print books. Powell's is an independent bookstore based in Portland, Oregon. .


몽캐는 책고팡을 나오면서 작은 책방이건 동네 책방이건 잘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온라인으로 연결되며 중간 유통단계가 붕괴되는 세상이다. 도매상과 소매상의 역할을 인터넷 검색이 대신한다. 그러나 누군가 전문적으로 제품을 검색해서 마우스 품을 덜어주고, 집 근처까지 실물을 가져다줘서 발품을 덜어 준다면 제품의 유통에 가치 있는 기능이 된다. 자본의 그림자에서 빛을 못 보고 사라지는 '( 많이 팔리지는 않아도) 좋은 책'을 누군가 대신 발굴해서 몰라서 못 보는 독자에게 연결해 줄 때, 작은 책방은 '작은 작가'들에게 빛이 될 수 있다.


특화된 목적에 따라 분류하고 배포하는 ( 큐레이션) 작업은 책 소매상으로서 창조적인 부가가치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그놈의 '지속가능(=먹고 사는 것)' 이 문제다. 큰 돈은 못 벌어도 유지는 해야 하는 데 그게 어렵다. 어느 지자체 도서관에서 시민의 희망도서를 동네 책방을 통해 신청받고 있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마트처럼 교보문고를 한 달에 몇 번씩 문 닫으라고 할 수도 없다. 자체 마케팅이 필요하다. 책방 주인이 아무리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적극적으로 영업을 '뛰어야지' 많은 사람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제주에는 아직 순 우리말이 많이 남아있다. '오름' 은 많이 알려진, 산을 뜻하는 제주 방언인데 '아부 오름'은 앞 오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곶자왈, 돈내코 같은 우리말 또는 한자 조합 고유어 지명이 많이 남아있어 신통하기도 하고 다행스럽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된다. 제주도 도로 표지판의 한자표기는 중국 관광객을 위해 표시한 것들이 섞여 있어 혼동이 된다. 아래 사진에 서귀포는 한자 지명이 맞지만 돈내코의 한자는 그냥 발음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돌아오면서 제주 친구가 제주 방언 번역 문제를 출제한다. 응용문제다.


'강방뫙 고릅서 '


답은


'가 보고 와서 말하세요'


강 =가서
봥= 봐서
왕= 와서
고릅서 = 말하세요



제주가 외국은 아니지만, 이민 간 문화가 더 보수적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제주말에 아직 남아 있다는 아래 아 발음을 다시 살려내서 육지로 끌고 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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