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칭과 존대의 인플레
전방에서 군대 생활할 때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다른 계절 일 수 있지만 내 기억 속의 군대는 거의가 겨울이다. 부대 연병장 ( 군인들이 훈련하고 운동하는 학교 운동장 같은 곳 )에서 소위와 상사가 삿대질을 하며 큰 소리로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간부들이 병사들 보는 공개된 장소에서 다투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장면이라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소위의 나이는 20 대 초반이었고 상사는 거의 50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 졸병들이 체감하는 고참 상사들은 호호백발 할아버지이지만 계급 정년이 있으니 그 정도 되었을 것 같다. 싸움의 배경은 생각이 안 나는데 분명하게 기억하는 건, 상사가 소위한테 한 말: '내가 육이오 참전했을 때 넌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한편 주임원사 일부는 지난달 인권위에 남영신 육군참모총장이 '장교들의 반말 지시가 당연하다'라는 취지로 발언했다면서 진정을 냈다. 현역 육군 간부들이 육군 최고 수뇌인 현직 참모총장을 상대로 인권위에 진정을 낸 일은 처음이다.
헤럴드 경제
며칠 전 장교와 부사관 간에 사용하는 말투와 관련하여 나온 기사다. 군대에서 부사관의 신분으로 참모총장의 지시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표한 사건이라서 화제가 되었다. 기사의 부사관들은 이 문제를 군대의 규율이 아닌 인권의 측면에서 제삼 기관이 살펴주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여론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갈라지는데, 군대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양쪽 다 쉽게 수긍한다.
한 쪽 : 전쟁할 때 '사격하십시오' 하고 존대하랴? 요새 군대 군기 빠져서...
다른 쪽 : 그럼 새파란 소위가 지 아버지 같은 부사관한테 반말해도 된다는 소리냐? 아무리 군대지만...
양쪽의 주장에 다 일리가 있고 서로 충돌하지도 않는다. 다만 서로 주목하는 논점이 다를 뿐이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우리말의 존대와 존칭을 남용하는 사회적 추세, 그리고 공과 사를 분간하지 못하는 세태가 문제라고 줄일 수 있다
명령 체계는 군대 조직 전체가 공유하는 본질적인 특성이자 핵심 질서다. 이게 무너지면 군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얘기다. 명령은 지휘계통에 따라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린다. 군인은 상관이 직무와 관련해서 내린 명령에 복종해야 하며 명령 불복종과 항명은 군 형법에서 엄하게 다스리고 있다.
군에서 상급자와 하급자는 계급으로 가린다. 모든 군인이 군복에 계급장을 달고 있다. 다른 직장에서도 계급에 준하는 직급이 있지만, 계급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옷과 모자, 어깨처럼 잘 보이는 곳에 표시하는 건 군인뿐이다. 직장에서도 과장 달았네, 임원 달았네 하면서 군인들의 계급장에 비유하고 있다. 군대는 계급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계급 집단은 밑에서부터 병사 - 부사관 - 장교로 나눠지는데 장교가 별을 달면 장군이 된다.
병사는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을 채우고 제대하며 계급 집단 중에 맨 아래에 위치한다.
부사관은 병사와 장교 사이의 중간 신분으로서 병사를 장교에게 대변하기도 한다. 부사관은 대개 한 부대에서 오래 근무하기 때문에 이동이 잦은 장교나 지휘관에게 부대 관리를 조언하는 역할도 한다. 전에는 하下사관이라고 통칭했는데, 지금은 아래 하下 대신에 버금 부副로 바꾸어 부사관이라고 부른다. 내가 군 생활할 때는 선임하사라고도 불렀는데 꽤나 친근한 호칭이었다.
장교는 병사와 부사관을 지휘한다. 부사관이 장교로 진급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장교는 주로 작전, 교육을 맡고 부사관은 차량, 식량 등을 지원하는 식으로 일의 성격이 다르다. 즉 장교와 부사관의 업무는 직속 통제보다는 라인이 다른 상호 보완의 관계가 많다.
정부나 회사 같은 조직에서도 상사가 지시를 내리는 일은 일상이다. 하지만 명령이나 복종이란 말을 잘 안 쓰고, 더욱이 말을 안 들었다고 감옥에 보내지도 않는다. 그만큼 군대에는 특수성이 있다는 얘기다.
명령은 대개 말로 한다. 작전 중에 카톡으로 '돌격 앞으로'를 명령할 수는 없다. 명령문은 일단 반말이다. 주어도 없고 감정도 없다. 반말로 하는 명령은 상대방을 하대하는 게 아니라, 긴급한 상황에서 간단 명료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무전기를 가지고 '여기는 백두산, 한라산 대답하라 오버' 했을 때 백두산이 한라산을 멸시하는 게 아니고, 백두산이 한라산보다 나이가 많을 필요도 없다. 음질이 안 좋고 잡음이 많은 무전기로 통신할 때의 요령일 뿐이다.
군대에서 명령과 지시를 반말로 하는 건 소통의 기술이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장교가 장교에게 한 것이든, 장교가 나이 많은 부사관에게 했든,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린 모든 명령은 마찬가지다.
군대에서 하급자가 상급자의 계급이나 보직에 님이라는 존칭을 붙인다. 민간인 조직에서도 그렇게 하지만, 군대에서는 이게 법으로 명시되어 있다. 다른 말로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님 자를 붙이지 말라는 암시로 볼 수도 있다, 내 생각이다.
장교와 부사관은 일정 기간 지나면 전역하는 병사와 달리 직업 군인이며 군의 간부다. 상급자와 하급자의 구도에서 다른 성격의 임무를 맡고 있는 직장의 동료다. 부사관이 진급을 해서 상급자인 장교로 임관하는 게 아니고 서로 비슷한 나이에 따로 군 경력을 시작한다. 당연히 초급장교보다 나이 많은 부사관이 많다.
나이가 많은 하급자와 일하는 경우는 군대 아닌 다른 조직에서도 많다. 조직에서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 편하게 반 말을 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직급의 서열과 나이가 거꾸로 갈 때는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무난하다. 우리나라는 장유의 구별이 분명하기 때문에 나이를 무시하면 반발이 일어나고 위화감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계급 위주의 수직 조직에서도 나이와 같은 비공식 서열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장교가 나이 많은 부사관 하고 얘기할 때 작전 명령이나 긴급 지시를 제외하고는 반말을 삼가는 게 무난하고 대부분들 그렇게 하고 있다. 장교와 부사관이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간부 간의 예절을 갖춘다. 위계질서는 어디까지나 조직 안에서 공적인 업무에 한한다. 부대 밖에서 둘이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적인 환경에서는 계급이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말투보다 애매한 게 존칭이다. 아랫사람에게 '님'을 붙이냐 여부를 가지고 고민한다. 일반 조직에서는 부하 직원이 나이가 많은 경우, 상급자가 존칭 여부를 선택한다. 붙이든 생략하든 상급자가 판단한다.
계급 질서가 명확한 군대에서 나이가 많더라도 하급자에게 님 자를 붙이는 건 혼란스럽거나 어색할 수 있다. 존칭은 존대와 달리 꼭 나이와 결부시킬 필요가 없는 어법이기 때문이다. 부사관이 나이 많은 병사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장교도 때에 따라 통제하는 직속 부하가 아니고 협조 관계에 있는 부사관에겐 님 자를 붙이는 걸로 알고 있다.
호칭으로 계급이나 보직을 부르는 데 있어 기본은 평칭이다. 상급자에게 님을 붙이는 건 반드시 상대방을 존경한다기보다는 상급자를 인식하는 표현으로 보는 게 무난하다. 부사관인 원사가 나이 어린 소위를 소대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수치가 아니고, 새파란 소위가 주임원사라고 부르는 것도 멸시가 아니고 조직의 질서라고 보면 맘이 편하다. 이런 질서를 이해하기 때문에 장교가 대위로 전역한 다음 부사관인 중사로 낮추어 다시 입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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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과 존대의 홍수와 인플레 속에서 평칭을 하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방송에서 식당 주인, 택시 기사는 이인칭이 아닌 객체로 부를 때도 사장님, 기사님이다. '사장님이 요새 코로나로 힘드시다.'라고 한다. 이렇게 마구 써 대니까 님 자를 생략하면 상대적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피한다고 어떤 직장에서는 모든 하급자에게 존대를 쓴다든지, 직급을 없애고 이름에 님 자를 붙이는 운동을 펴는데 자연스럽지 않다.
존대, 존칭은 우리말의 귀중한 특징이면서 자산이다. 분별없이 쓰는 게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사물 존대, 객체 존대, 과잉 존칭이 여과 없이 늘어나고 있다. 안 붙여도 될 높임말을 변별력 없이 사용하면 말만 낭비하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으로 높이고 보자는 비겁한 어법이 우리말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불편하면 말하기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