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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08. 2020

간호사분, 의사분, 둘 다 틀렸다,
그리고 환자분도.

높임말 오남용

2020.10.25 부분 수정, 추가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문 대통령이 페이스북 글에서 간호사에게는 ‘존칭’을 사용하면서 의사들에게는 쓰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간호사들을 격려한 페이스북 글과 관련된 보도 중 하나다. 글에서 '간호사'이라고  했는데, 의사한테는 '분'을 안 붙였으니 차별이라는 보도다. 나는 그 '일각'의 주장도 '대통령 글' 도 양 측 모두 어법상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사든  호사든 뒤에 붙는 '분'은 불필요하고 어색하다. 다수를 상대로 하는 공적인 글에서 객체를 높이는 것은 어법에도 어긋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높이는 말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말이 어수선해지고 있다. 




후보자님의 따님분께서 하시지 않으신...

작년 언젠가 고위 공직자 후보가 주선한 기자회견에서 한 젊은 기자가 질문을 시작했다. 국민의 관심이 높았던 사안인 데다 실황이 중계되어서 그랬는지 회견의 발언자보다 오히려 기자들이 더 긴장한 듯 보였다. 시청자나 독자들을 대신하는 기자는 (자신의 나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취재 대상에게 지나치게 공손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중복되고 잘못된 존칭으로 범벅이 되어서 질문은 무뎌졌고 반면에 상대방은 여유가 생겼다. 




이 옷은 고객님께 조금 크십니다.
이번 주가 사은행사 기간이시기 때문에 함께 구입하시는 편이 훨씬 좋으시답니다.
이쪽 여성분께서 부모님분께 드릴 선물을 고르신다네요.
재킷 색상이 너무 예쁘게 나오셔서 조만간 다 팔리실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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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는 천연가죽이고요 사이즈는 M, X, XL 세 가지로 나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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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전부 구입하시면 9만 8천 원이세요. 결제는 어떻게 하실까요?


국립 국어원에서 예시한 적이 있는 높임말의 잘못된 용례들인데 주위에서도 자주 듣는다. 모든 인칭에 '분'이나 '님'을 붙였고 어디는 아예 두 개가 겹으로 붙었다. 그리고 주체가 사람이건 사물이건 거의 모든 서술어에 높임말 어미 '시'를 끼워 넣었다. 고객을 왕처럼 모시고 싶은 점원의 존댓말 강박증이 빚은 웃음거리다. 높임의 주체를 손님에 한정해서 쓰는 것도 번거롭고 해서 대화에 나오는 모든 용언에 '안전하게' 일률적으로 높임말 어미를 갖다 붙였다. 그러면 듣는 손님은 기쁠까?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신이 옷이나 색상, 가격 같은 사물과 동격으로 취급된 것에 기분이 상해야 한다.  그런데 백화점뿐이 아니다. 방송도 만만치 않다. 




아래는 개를 버리는 사람들을 취재한 어느 지상파 테레비 뉴스의 일부다.

정말 개를 좋아하시는 분도 있는 반면 버리러 오시는 분들도 은근히 보이거든요. 개를 예뻐하시는 분과 아니신 분은...

방송에서는 (시) 청자 위주로 높임말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위 사례는 객체가 되는 개를 갖다 버리는 사람들을 모든 시청자가 높이는 꼴이 된다. '팬 분', '아내분'... 언제부터인지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행자 출연자 할 것 없이 모든 객체에 분별없이 높임 어미 '시', '분' 등을 쓰고 있어 듣기에 번거롭고 거북하다. 십수 년 전에는 어느 연예인이 '김정일 분'이라고 하는 소리도 들었다. 물론 영화에서 역할을 의미하는 그 '분扮'이 아니었다. 





한국어에서 경어법은 대단히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효과적인 언어 사용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경어법을 적절히 쓰는지에 따라 대화의 성공 여부가 갈리고, 사람들 관계가 멀어지거나 가깝게 조정되기도 한다. 그것은 버려야 할 과거의 권위주의 시대 유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우리말 사용에서 아주 유익한 언어 표현이다. 경어법은 사람들 사이의 바람직한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며, 예의를 갖추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를 열어 나가는 데서 효과적인 사회적 공기(公器)이다   :   한국어 경어법, 힘과 거리의 미학  이정복 교수


높임말 또는 경어는 우리의 소중하고 유익한 문화 자산이다. 어법에 맞추어 사용해야 빛이 나고 발전한다. 어법이 복잡해서 외국인들이 배우기 어려워한다고 교육 내용에서 제외하자는 이도 있는데, 이는 침대가 짧으니 다리를 자르자는 말과 같다. 아래 두 문장을 비교해 보면 우리 존댓말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경제적인지 알 수 있다.  존대 기능이 약한 외국어에 들어가는 사회적(공손한) 어휘들을, 우리는 높임 어미 한두 개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물 한 잔 만 갖다 주세요'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면
'Wilt u me een glas water brengen, alstublieft?' 이라는 긴 문장이 된다.

우리말에서는'만' '세요' 정도로 간단하게 공손한 명령문을 만드는 반면, 높임말이 약한 네덜란드어에서는 일단 'Wilt'로 의문문을 만들고 다시 감탄사 'alstublieft' ( 영어의 please와 비슷)를 넣어야 비로소 우리말과 공손한 정도가 비슷한 문장이 된다.   




방송이나 백화점에서처럼 모든 대화에 등장하는 객체를 높이는, 이른바 '백화점식 높임법'이 밑져야 본전일 거라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분'은 의존 명사로서 '반대하는 분', '다섯  분' 같이 꾸미는 말 뒤에 온다. '친구분'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서 접미사 역할도 하지만 제한적이(어야 한)다. '분'을  '보호자분', '청취자분'처럼 막무가내로 붙이고 있는데 높임 어미의 잘못된 용례이며 더 퍼지기 전에 바로잡아야 한다. 


높임말 어미  -시 ( 선어말 어미)의 쓰임에서 그 기능을 나름대로 짐작해 본다. 존경의 대상에게 말을 뱉기 전에, 문장의 중심이 되는 동사에 -시라는 어미를 끼워 넣음으로써 말을 한번 거르는 효과가 있다.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밟아 조심스럽게 서행하는 원리와 같다. 그런데 아무데서나 브레이크를 잡으면 속도가 느려지고 브레이크 패드는 빨리 마모된다. 


획일적인 높임말은 오히려 말하는 이를 천박하게 만든다. 높임말의 인플레를 초래해서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면서 전달 효과는 반비례한다. 흔히 존대를 사양할 때 '말을 놓으라'라고 하는데, 존댓말은 말을 올리고 있어 힘이 든다는 것을 암시한다. 잠깐씩이면 몰라도 (실속 없이) 계속 들어 올리고 있으면 힘이 빠지고 말하기가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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