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위로 말하면 우리말 오백 년도 못 간다
요즘 사장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곳은 식당이 아닐까 한다. 이모나 언니로 통하는 종업원을 제외하곤 주인 포함 모든 손님이 사장님으로 불린다. 손님과 주인은 서로 명예로운 사회적 직함을, 종업원에게는 친밀한 친족 관계를 선택하여 호감을 표시한다 ( 반찬 보충 등 아쉬운 게 없으면 '여기요'라고도 하지만 ). 손님이 회장이건 백수건 또는 부장 판사라도 호칭은 사장님 하나로 통일된다.
환자 입장에서 생명을 다루는 의사를 최상의 칭호로 부르고 싶은 심정은 당연하다. 그래서 찾아낸 호칭이 '선생님'이다. 만일 어느 환자가 병원에서 젊은 여의사를 '아가씨' 혹은 '저기요' 하고 부른다면 극단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1. 직함으로 불러줘서 명예를
동아시아권에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해서 근대까지 양반들은 자를 붙이거나 호를 만들어 불렀다. 지금은 회장이나 국장 등 직함을 밖에서도 불러주면서 호의를 표시한다. 직함이 존칭을 겸하게 되었다. 서양에서도 장군, 대사 등 공적인 직책이나 전직을 불러주지만 (아마 나라에 대한 헌신이나, 나라를 대표한 명예를 기리는 의미에서), 직장의 직위를 찾아내서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불러야 할 대상이 여러 조직에 관여하고 있어 직함이 복수인 경우에도 그중에 가장 명예로워 보이는 걸 '발굴' 해내 ( 과거의 직위 포함 ) 불러준다. 그래서 은퇴한 사람은 대개 여생을 퇴직 직전의 직함으로 불리며 산다.
회사나 기관 등 특정 조직에서 붙여준 직함이 (맘 좋게도) 외부에서도 통하면서 사회적인 위상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직장을 옮기면서 전 직장에서 차장이었으니 여기서는 부장 이상은 달아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두 직장의 규모와 직급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억지이지만 적어도 이해는 해주는 게 우리 사회의 정서다.
직위가 사회적으로 호환되다 보니 조직에서 성취동기를 자극하는 역할도 한다. 처갓집에 갔을 때 장인이 '오서방 자네 부장 달 때 아직 안 됐나' 하고 묻는 상황까지 가기 전에, 조早기는 아니래도 적適기에 계급장을 바꿔 달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속한 조직의 상급자를 부를 때는 아예 이름과 성을 빼버리고 그냥 부장님, 장관님을 바친다. '당신은 조직 내에서 나의 유일무이한 부장이고 장관이므로 굳이 이름 같은 거로 구별할 필요가 없다'라는 거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라는 갸륵한 충정이 깔려있다.
그런데 이 호칭의 구도가 확대 적용되고 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가 회진할 때는 학구적인 분위기가 된다. 환자인지 학생인지, 병실인지 교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여기저기서 '교수님'을 찾는다. 다녀보지도 못한 대학의 젊은 교수가 나의 '교수님'이 되고 모르는 회사의 대표도 나의 '사장님'이 된다. 상대방이 지배하는 조직에 선제적으로 '위장 전입'해 들어가서 수직적 상하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존경심을 확고히 하는 효과가 있다. 가끔은 자기가 상대방과 같은 물에서 노는 선수라는 걸 은근히 알리고 싶어 그러는 치들도 있다. 고명한 학자를 인터뷰하는 방송인이 한없이 궁금한 얼굴로 말끝마다 '교수님'을 반복할 때는 이런 의도를 의심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선생님'의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 간호사, 요양사, 미용사처럼 자격을 뜻하는 호칭 뒤에 그냥 '님'자만 붙여선 약간 허전하다 싶어서 그런지 선생님이 추가된다. 관공서에서 민원인 부를 때, 음주운전 단속할 때 측정기를 잘 안부는 사람한테도, '(더 더 부세요) 선생님'이다. 정작 학교 선생님은 쌤으로 바뀌고 있다. 호칭의 인플레로 약발이 다한 선생님 대신 의사도 조만간 다른 호칭을 물색해 봐야 할 것 같기는 하다.
2. 친족 호칭으로 친밀감을
한편 명예보다 친밀도가 우선하는 선후배 사이엔 형제 자매가 동원된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직계 혈연을 가장하여 형, 오빠, 누나, 언니가 된다. 식당에서 가서는 종업원을 내게 밥을 차려주는 언니 이모 같은 가족으로 편입시켜서, 이것저것 귀찮게 하는 미안함을 상쇄시키고픈 속내가 들여다 보인다.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가족이 아닌 남에게 밥 시중을 드는 걸 저급하게 여기는 감상이 있다.) 이제는 애완견에게까지 인격을 부여하고 '아이'로 불러주며 사랑을 재확인해 준다
호칭이 직함의 영역에서 친족의 영역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인 친분이 쌓이면서 호칭이 '사장님'에서 '형님'으로 갈아탄다. 관계의 역사가 짧아도 마주 앉은 식탁에 빈 소주병이 빽빽하게 들어서면 하루 저녁에도 형 동생 사이로 발전하는데 이때 예민한 정보 (영업 비밀)가 '형님만 알고 계세요'라는 보안 지침 하에서 유통된다. 은밀한 일을 도모하는 데는 아무래도 끈적한 가족 관계가 유리하긴 하다.
정작 오래전부터 차용해서 쓰던 친족 호칭은 퇴출되고 있다. 예전에 아저씨 아줌마는 부모 항렬이나 형수 뻘을 부르는 정겨운 말이었다. 상사의 아내가 아주머니에서 스승의 부인을 뜻하는 사師모님이 되었고 백화점 여자 손님에게까지 널리 쓰이고 있다. 심지어는 사장 부인을 회사를 의미하는 사社자를 사용, 사모로 지칭하기도 한다. 국모國母가 상기된다. 천박하게 사용한 창의력이다. 직장 생활을 힘들게 하고 싶으면 사장 부인을 아주머니라고 한번 부르면 된다.
3. 수평 관계 호칭는 어중간해
나이나 직책이 같거나 낮은 사람에게는 성과 직위를 함께 쓰면서 님을 안 붙이는데 이게 문제다. 낮추어 부르는 방향성이 강하므로 상대방과의 상하 위상이 분명치 않으면 적용 여부가 조심스러워진다. '말을 트는' 상호 승인 절차를 거쳐 해결하기도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 평칭과 존칭을 선택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또래 간에도 존칭을 붙이면 안전하긴 한데 상대적으로 자기가 낮아지는 역학적 불리함이 있다. 민감한 문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수
호칭은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존칭은 그 존재를 선택적으로 높이는 게 목적이다. 호칭의 중심은 이름인데, 우리 '이름'은 막역한 친구 사이 아니면 집안에서 촌수가 아래인 어린아이를 부를 때 정도다. 그 외에는 이름을 부르면 욕이 된다. 이름과 이인칭 대명사의 용도가 제한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한다.
1. 가족끼리 호칭은 발달
대 가족 중심의 사회에서는 나이와 항렬을 기준으로 상하 서열이 촘촘하게 구별되고 가족 간 호칭도 발달했다. 가족 호칭은 대개 아버지 어머니 삼촌처럼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르는 용도인 반면, 윗사람은 이름과 이인칭 대명사로 아랫사람을 부른다. 따라서 수직 중심의 가족관계에서 호칭의 공백은 없다. 가족 간에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수평적 관계는 없으니 수평 호칭의 수요도 없다.
2. 그렇지만 사회 호칭은 빈곤
2-1 수직관계 : 과도한 존칭, 돈 안 드는 건데 인심이나 쓰자
함부로 못 쓰는 이름과 대명사를 존칭이 대신한다. 존칭이 남발되어서 그 가치가 절하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더 쎈 존칭을 찾는다.
2-1-1 : 업계 서비스 경쟁에 편승해서 어법에 맞지 않는 존칭을 무차별적으로 남용하고 있다. 안전'빵'으로 너도 나도 인심 좋게 올려주니 변별력은 없어지고 실속 없이 말만 많아졌다. 식당 주인은 모든 손님을 사장님으로 통칭한다. 밑져야 본전이다. 설사 사복 입고 들어온 군단장을 사장님이라고 부른 들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도 아니다. 나중에 꽁치구이 한 접시 서비스로 올리면 전화위복이 된다.
2-1-2 : 사회에서 마찰을 최소화하고 싶은 용렬 맞은 대인관도 존칭 과장의 원인으로 보인다. 좀 높여주어서 쉽게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는 얄팍한 계산이 우리 언어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다. 당당하게 평칭을 못 쓰고 슬금슬금 접대성 존칭을 날린다.
3. 중립 관계 : 궁색한 호칭
3-1-1 수평 : 호칭이 양극화해서 수평 중립적인 관계의 호칭이 소멸하고 있다. 존칭의 홍수로 존대의 가치가 절하되어 평칭이 되고, 평칭平稱은 낮추어 부르는 비칭卑稱이 되어버리는 평가절하가 도미노식으로 일어난다. 대화할 때 존대가 관련되는 말머리와 말끝을 우물쭈물 흐리는 일도 많다. 대화를 회피하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도 오빠 동생으로 부르는 게 이제는 일반화되고 있다.
3-1-2 초면 : 초면의 상대도 거북하다. 차라리 나이가 많거나 어리면 자연스럽게 '어르신', '얘들아'로 부르면 되는데 그게 아니면 대중없다. 양적으로 용례가 가장 많은 중립적인 대역의 호칭이 모호해지면서 기형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안 부를 수도 없고 해서 어이, 저기요, 여기요, 학생, 청년, 총각, 아가씨, 아저씨, 아줌마, 선생님까지 다양하게 갖다 붙이고 있지만 잘 못 쓰면 비칭卑稱(낮추는 부름)으로 오해받을 위험한 호칭들이다. 애매하니 가급적이면 안 부른다. 상대방 호칭을 생략하고 대화를 하니 전달이 부정확해지고 되풀이된다. 불편하다. 불편하면 대화가 적어진다.
4: 그렇게 되면
말이 산만해진다.
말이 낭비적이고 (=말이 많고 ) 전달력이 떨어진다.
한편 어떻게 부를지가 애매해서 대화가 부정확하고 불편하다.
지금 시대 우리말의 호칭은 오히려 사회생활에 (은근히) 장애가 되고 있다.
존칭의 인플레를 화폐처럼 인위적으로 개혁할 수는 없다.
문제 해결의 핵심은 이름과 이인칭 대명사의 보편적인 활용에 있다. 그러면 많은 경우의 (이 말썽꾸러기 ) 존칭을 대신할 수 있다. ( 직위를 없애고 이름+님만 부르는 시도를 회사 같은 폐쇄 조직에서는 강제할 수 있지만 사회에서는 어렵다. )
사회는 수직에서 수평형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수평관계의 언어가 빈약하다. 우리말이 사회 변화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결코 우리말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전적으로 사용자인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가 풀어야 한다.
말은 자연스럽게 변천해야 하지만 이 호칭 문제는 어문 정책의 테두리에서 고민하고 푸는 게 좋겠다.
홍길동 의원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방금 홍 의원님 께서 저희가 홍 의원님과 협의를 안 했다고 했는데 어제 9시에 홍 의원님과 임꺽정 의원님 두 분이 협의를 했고 홍 의원님께서 더 이상 협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홍 의원님은 준비위 안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못 들었다고 하시는데 사무국에서 홍 의원님 보좌관을 통해 충분히 공지한... '
어느 지방 의회의 회의록에서 이름만 바꾼 건데, 대화의 노란색 부분은 모두 같은 사람의 존칭을 반복하고 있다. 만일 ( 영어의 YOU에 해당하는 ) 짧은 이인칭 대명사로 바꿀 수 있으면 얼마나 대화가 간결해지고 전달력도 좋아질까? 지금은 마땅한(=안전한) 대명사가 없다.
불편하면 말하기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