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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Feb 16. 2021

오대산 선재길에서

탄허 스님을 만나다.


오랫동안 눈에 밟히던 오대산의 선재길을 발로 밟아보고 왔다.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하루 두 곳의 절에 걸음 했다. 완만해서 만만한 선재길은 강원도 평창 월정사 상원사 사이를 오가는 숲길이다. 두 절의 고도 차이가 삼백 미터 정도인데 십 킬로 미터를 걸어 올라가니 경사도 삼 퍼센트 미만의 편안한 산행이 된다. 경사도가 30%를 오르내리는 지리산 천왕봉의 중산리 코스에 비하면 평지다. 어린이나 고령자도 운동화 신고 가볍게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다.


월정사 일주문 현판의 부리부리한 글씨가 아무 생각 없는 순례자의 정신을 버쩍 들게 한다. 보통 현판은 '설악산 신흥사' 식으로 산 이름부터 앞세우는데 여기는 그냥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 즉 월정 큰 절이다. 월정사가 오대산 속에 있는 게 아니고 오대산이 월정사 경내에 있다는 얘긴가? 아닌 게 아니라 상원사 포함 아홉 개의 월정사 소속 암자들이 오대산 골짜기 곳곳에 들어앉아 있다.


나의 협량한 안목에도 현판의 글자 모양이 자유롭고 화통化通하다. 탄허 스님이 썼다고 한다. 비스듬한 월 자는 달이 떠오르는 듯하고, 굽은 데 없이 곧게 그은 클 대 자의 세 획이 힘차다. 나는 화가 났을 때 이렇게 쓰는데...


탄허 스님은 월정사에 머물면서 18년에 걸쳐 화엄경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출판했다. 청담 스님은 이를 두고 이차돈 순교 이래 최대의 불사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무서운 사천왕이 검문하는) 천왕문까지 800 미터 가량 알싸한 피톤치드 향의 전나무 숲 길이 이어진다. 부안 내소사, 광릉과 아울러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길이라고 불린다.


월정사의 키워드는 문수보살이다. 사찰의 기록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 유학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와서 창건했으며, 오대산 전체가 문수보살의 성산이라고 되어 있다.


월정사는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로서 사격寺格도 높다. 상원사를 포함해서 강원도 거의 모든 절이 여기 월정사의 말사末寺다. 6.25 전쟁 때 전소되었는데 중창했다. 우리나라 오래된 절들은 임진왜란 아니면 6.25 때 한 번씩 불에 탔고 겨우 석탑만 건졌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에서 태어나 반야(般若)의 도리를 선양한 이로써, 반야 지혜의 권화(權化)로서 표현되었고 지혜를 취급한 ≪반야경≫을 결집•편찬했다.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은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化身)이다. 지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곧 마음에 아무런 분별심·차별의식·우열 관념 등이 없는 한없는 고요 속의 밝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적광전 옆으로 해서 후문을 나가니 계곡 따라 숲길이 나오는데 선재길 표시가 보인다. 법당을 지나가며 혹시 벽면에 심우도가 있나 봤는데 없다. 선재길은 옛날부터 스님과 불자들이 걷던 구도자의 길로 알려져 있다. 문수보살의 지시에 따라 남방의 선지식들을 찾아 성불했다는 선재동자善財童子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저만치 따로 닦아 놓은 비포장 차도가 오대천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선재길과 보일락 말락 하며 같이 간다. 요새는 시골의 좁은 농로도 콘크리트를 쳐서 포장한다. 산문山門 안에 있는 모든 도로에 포장을 하지 못하게 한 월정사 주지스님의 혜안 덕분에 미생물이 살아가는 흙길로 차가 다닌다.


포장한 도로는 땅이 숨을 쉬지 못한다. 빗물이 겉돌아서 지하수가 고갈되며 죽은 땅이 된다. 여행하면서 사통팔달 뚫려있는 자동차 도로에 감탄을 하다가 옆을 보면 또 새 길이 나고 있다. 걱정된다.


계곡의 얼음이 녹은 틈으로 물소리 졸졸 들리는 바위에 앉았다 간다. 세조가 상원사로 가던 길에 이 계곡에서 목욕을 하면서 어린 동자승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동자승한테 어디 가서 왕의 등을 밀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이 임금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이 등을 밀어줬다고 하지 마시라고 하더란다. 돌아다보니 동자는 간데없고 등에 난 종기는 다 나았더라는... 왕이 고마워서 상원사 법당에 문수동자상을 세워주었다. 법당 이름이 문수전.


절을 개창한 자장율사가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친견하려다 못한 문수보살이 피의 군주 세조의 때를 밀어줬다는 설화다. 왕통에 열등감이 있던 수양대군 측과 억불숭유 정책으로 핍박받던 불교계가 공동으로 기획한 언론 플레이가 아니었는지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나는 어젯밤 영월에서 자고 오는 길이다.


오솔길이 훤하게 트이는 개활지는 대개 화전민 터다. 산에 불을 놓고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던 화전민들은 1960 년대에 국립공원 밖으로 이주해서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산림을 훼손하는 바람에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던 산림녹화 사업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국민학교 때 화전민은 산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는 별난 사람들로만 알았지 그들의 고달픈 삶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 이제는 사회가 고달파서 산으로 들어간다는 자연인이 늘고 있다.


평탄하던 순례자의 길은 마지막에 가팔라져서 상원사를 우러러보면서 끝난다. 상원사에서 2 킬로 더 올라가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이번에 선재길을 걸으면서 탄허 스님이라는 선지식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유불선 그리고 기독교의 근본 원리를 회통한 ( =융복합한 ) 탄허 스님을 더 알아봐야겠다는 숙제가 생겼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삼신일불이신 부처님은 과연 하나일까?




심우도尋牛圖는 월정사 적광전 뒷면에 그려져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앞에 가져다줘도 보지 못한다. 잠을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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