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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주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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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06. 2021

텍사스 휴스턴 이야기 2

라쿤

Photo by Marieke Tacken on Unsplash


휴스턴에서 살았던 집은 뒤뜰에 수영장이 있었다. 더운 지방이라 수영장 딸린 집이 많다.


언제부터인가 밤중에 지붕에서 소리가 났다. 무언가 쥐보다는 큰 게 뛰어다니는데 여러 마리였다. 밤에 마당에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수영장에 시커먼 게 빠져있는데 가만히 보니 움직였다. 라쿤 일가족이 지붕을 타고 넘어와 수영을 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 밤 찾아왔다. 수영은 나보다 잘했다.


아이들이 주말마다 동네 대항 수영 시합에 나갈 때라 자주 집에서 연습을 했다. 라쿤이 놀다간 다음 날은 찜찜해서 수영장 물을 갈고 나서 애들을 집어넣느라고 성가셨다.


이웃집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무슨 숫자를 얘기하면서 서서 쏴 동작을 취한다. 총이 흔한 동네다. 우리가 14번 하면 마을버스 노선이듯이, 12 게이지gauge 하면 샷건shotgun의 종류다. 텍사스에서는 집안에 들어온 야생동물을 쏴도 된다고 했다. 기르고 있는 동물을 학대하는 건 위법이지만.


구청에 전화를 해서 사정을 얘기하고 도와달라고 했더니 라쿤이 우리한테 문제를 일으키냐고 물어본다. 지붕을 뚫고 들어와서 다락방에 아예 살림을 차리고 시끄럽게 한다든지 하냐는 거다. 내가 우물쭈물하니까 저쪽에서도 그 정도는 그냥 봐주는 게 어떻겠냐고 한다.


휴스턴은 아열대성 기후에다 주변에 숲과 늪지가 많아 다양한 야생동물의 생태계가 조성되어 있다. 다리 위로 악어가 기어가기도 하고 저녁 하늘엔 박쥐가 낮게 날아간다. 라쿤은 숲 속에서 살지만 환경에 적응을 잘해 도시에 진출해서 쓰레기 통 뒤지는 게 목격된다. 앞발에 손가락이 있어 손재주도 좋다. 생긴 건 귀엽지만 한 성질 하고 광견병을 옮기기 때문에 사람이 가까이하거나 만지면 위험하다.


홈디포(Home Depot : 잡화 백화점)에 가서 철망 덫을 사서 안에 참치 캔을 따서 넣고 수영장 주변에 놔뒀다. 밤새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미리 알아둔 시내 동물보호소로 데려갔다. 가서 접수를 하니 어디 갔다 이제 왔냐는 듯이 라쿤을 반갑게 맞아준다. 순간 그 사람들과 라쿤이 좋은 나라고 내가 나쁜 나라인 불편한 구도가 그려졌다. 빈 덫을 받아들고 얼른 나왔다.


식구 중에 한 마리가 당했으니 멀리 가버렸겠거니 한 라쿤은 그날 밤 또 찾아왔다. 영리하다는 이 동물이 어떻게 된 건가, 오기 부리나? 하는 수 없이 다시 덫을 놨더니 또 한 마리 걸려들었다. 


요령은 전과 동. 보호소에 데려다주고 나오면서 접수하는 이에게 물어봤다. 라쿤은 여기서 기르나? 아니면 숲에다 풀어줘? 돌아온 대답은, 

풋다운 put down. 

무슨 말인지?

푸투슬맆put to sleep ( 안락사 ) 이라고요!!




브런치 작가 초이스 님이 캐나다 토론토에서 라쿤 잡는 아르바이트 한 경험을 쓴 적이 있다. 작년 말에 올렸는데 제목이 '라쿤 따라 삼매경'이다.


토론토엔 세계 라쿤의 수도라고 할 정도로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밤에 떼로 다니면서 쓰레기통을 뒤지는데, 지능이 높아 쓰레기통 장치를 개선해도 따고 들어가 당국에서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https://brunch.co.kr/@williams8201/39


지난주 '토론토 스타 Toronto Star'의 보도를 보니 작년 2020년 한 해 라쿤에 의해 다쳤다고 신고한 건수가 2019년에 비해 3배나 늘었다고 한다. 라쿤이 갑자기 어떤 이유로 공격적이 됐을 수 도 있고, 아니면 코로나로 사람들이 실내에서 생활을 많이 하는 바람에 라쿤에 많이 노출되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전자의 경우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라쿤이 인간을 공격하는 시나리오는 생각도 하기 전에 소름이 끼친다.


https://www.thestar.com/news/gta/2021/03/02/its-not-them-its-us-raccoon-sightings-injuries-in-toronto-soar-during-covid-19-lockdown.html




그 후로 라쿤은 우리 집에 다시 오지 않았다. 두 식구나 불상사를 당했는데 다시 오면 그건 라쿤도 아니다.


데려간 라쿤을 동물 보호센터에서 처리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구태여 거기 안 갖다 주고 좀 떨어진 공원에 가서 놔주었을 거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를 공격할 때 반격하는 정당방위는 자연의 법칙이다. 하지만 집 마당에 들어오는 걸 침입으로 규정한 건 인간에 한정된 도덕적 문제다. 라쿤은 그 규범을 만드는데 참여할 기회도 없었고 동의한 적도 교육받은 적도 없다. 오히려 라쿤의 조상이 살던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와 말뚝 박고 집을 지었다면 주거침입은 사람이 저지른 셈이다.


라쿤이 더운 여름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수영을 즐기면서 예전 잘 나갔던 집안 내력을 좀 부풀렸을 수는 있다. 나는 그게 불편하고 안전이 걱정된다는 이유로 영문도 모르는 라쿤을 죽게 하고 가족을 파탄 냈다. 목적과 수단의 비례 원칙에도 어긋나는 폭력이다. 


단지 연대하지 못하고 조직이 없어 인간에 대항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물들이 당하고 있다. 편익을 명분으로 자행하는 가축의 살처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다는 변명은 궁색하다. 인간은 힘으로 남을 다스리는 걸 야만적이라고 질색한다. 원주민을 말살하면서 영토를 개척하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으스대는 강국은 그러면 뭔가. 사람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힘이 있다고 자기를 거스르는 개체를 제거하는 행패를 계속하면 지구 상엔 지배자와 말 잘 듣는 사람, 가축, 그리고 바이러스만 남을 것이다.


라쿤 이야기하다가 너무 멀리 왔다. 날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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