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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pr 02. 2022

미움의 알고리즘

유럽의 서머타임

네덜란드에 주재원으로 가있을 때, 한동안 사무실에 한국 사람이 나 혼자였다. 

결혼 전이라서 집에 가도 혼자였고.


출근 시간은 9시였지만, 나는 보통 8시면 사무실에 나왔다.

어느 월요일 아침에 직원들 출근 상태가 평소보다 불량했다.




"9시 반이 지나가는 데 한 (연) 놈도 안 나타나네. "


"이틀씩이나 쳐 놀고 나서 ( 아직 한국은 토요일 근무할 때다.)..."


"관리부 M은 축구하다 발목 다쳤다고 절뚝이며 나타날 거야, 다음에 직원 뽑을 때 동네 클럽에서 축구한다는 놈은 무조건 탈락이다. "


"비서 F는 감기 어쩌고 하면서 전화로 병가 낼 터이고 (call sick). 이놈의 나라는 월요병 때문에 망해. "


"오늘은 H 이사까지 늦네. 집이 멀다고 징징대는데 솔직히 이 나라에 먼 데가 어디 있어. 두 시간만 차 몰고 나가면 바닷가 아니면 국경인데... "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나를 물로 보는 거야."


독백 속에 미움은 포도처럼 영글고,

10시가 다 되어 기신기신 나타나는 직원들과는 눈도 안 마주치고 시계를 보며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다.


이날 지각한 직원은 없었다.


유럽에선 3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서머타임을 시작해서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되돌린다.


서머타임으로 한 시간씩 바뀌는 때에 즈음하면 방송이나 여러 기관에서 반복해서 얘기해주므로 현지 사람들은 놓치지 않는다.


결혼 전이라 혼자 살고 현지 방송도 안 보던 때라 서머타임으로 시간이 바뀌는 시기엔 번번이 당했다.

특히 한 시간이 늦춰지는 가을날의 아침엔 동료 직원들을 미워하며 이를 갈다 겸연쩍게 끝났다.




미움은 자가自家 증식한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불어난다.


일단 미움이 분노의 열차에 올라타면 멈추기가 어렵다.

미움의 불씨는 작고 연약하지만 상상 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들불처럼 번져나간다.

맞불을 놓아 불길을 잡아볼 겨를도 없다.


미 실현된 가상을 예단하고 또 다른 의심이 꼬리를 물며 미움은 재생산된다.

신념과 일치하는 기억이 자양분이 되어 미움의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극 중에서 상대방은 이미 죽일 놈(들)이 되어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판이 커진다. 실체 없는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미움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충실해져 가공할 만한 시너지를 낸다.


다수에게 전달된 가짜 뉴스가 비슷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감수성을 폭발시킨다. 소문은 여과 없이 진실이 되고 대중은 미움으로 흥분한다.


미움의 대상은 사람이다.


배로 강을 건너다 빈 배가 와서 받으면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배에 한 사람이라도 타고 있다면 배를 돌리라고 소리칠 것이다.  
장자莊子 외편 外篇 허주



그리고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 그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서 자신의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것이다. 자신의 속에 없는 것은 절대로 자기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이번 주부터 유럽의 서머타임이 시작되었다, 아이슬란드와 러시아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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