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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15. 2021

영화 미나리가 진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 몇 가지

영화 줄거리 없음

https://www.donga.com


나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감상을 하는데 필요한 심미안이 남들에 비해 부족하다. 같이 앉아 영화를 본 아내한테서 도대체 무얼 본 거냐는 모욕적인 핀잔을 들을 때도 있다. 그래서 미나리의 끄트머리가 좀 싱겁지 않냐는 둥 나의 밑천을 드러낼 수 있는 위험한 질문은 피한다. 자연히 영화의 작품성이나 예술성 대신에 '그럴듯한 실감'에 관심을 가진다.


영화 스토리의 흐름부터 소품까지 곳곳에서 현실감은 몰입에 도움을 준다. (강호동도 아니면도) 여행 캐리어를 한 손으로 덜렁 들어 올리는 TV 드라마의 무성의한 연출을 (다행히) 영화에서는 보기 어렵다. 주인공이 손을 들고 택시! 한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와서 서지도 않는다.


영화 미나리가 진솔해서 좋았다고들 한다. 미국에서 한국 가정이 정착하는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극화했다. '진솔하다'보다는 '실감 난다'라는 평이 더 실감 난다. 이민자들이 영화를 보고 옛날 생각에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만, 기록영화처럼 무덤덤하다는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전율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고통을 기억하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전에 미국에서 몇 년 산 경험을 토대로 현실감의 관점만 가지고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한다.




극 중 인물

과묵한 초지일관의 주인공 옆에서 수다스러운 조연이 웃기는 상투적인 설정이 아니어서 좋다. 극 중 인물 모두에게서 사람 냄새가 난다.


직장 다니며 안전하게 애들을 키웠으면 하는 애 엄마와, 맨 땅을 개척해서 한 방을 노리는 애 아빠의 갈등은 낯설지 않은 구도다. 애 아빠 (스티븐 연)는 고집을 부리면서도 내심 조금은 흔들리지만 농장 프로젝트를 밀어붙인다. 자침이 떨리지 않고 고정되어 있으면 고장 난 나침반이다. 구원군으로 친정엄마 ( 윤여정)가 투입된다. 내가 본 미국의 한인 가족은 모계 중심 사회다. 여자끼리는 자매간, 남자끼리는 동서 간이 흔하다.


미국에선 의외로 한국에서 미군으로 근무했다는 사람들과 많이 마주친다. 아는 한국 지명( 대개 알아듣기 힘듦) 몇 군데 교환하면서 친근감이 생긴다. 한국 애를 입양한 미국 부모를 봐도 빚진 사람처럼 미안해진다. 답답한 미국인에 대한 불신과 편견에도 불구하고 제이컵이 현지인 폴을 채용한 데는 그의 한국 근무 경력이 작용했을 것 같다.


배경

우리 주위 이야깃거리의 무게 중심이 (산술적인 평균과 무관하게) 아직은 서민 생활에 있다. 한국 영화엔 골목길이 나오고, TV 드라마엔 부잣집 거실이 나온다. 이민자 가족의 신산한 이야기는 영화 소재로 잘 어울린다.


한국이 수출과 건설로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한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가족의 자전적 이야기를 극화했다. 한국에 있었으면 회사 다니며 재건축 아파트에 투자도 좀 하며 살았을 곱상하게 생긴 주인공이 미국 남부 아칸소의 황무지를 바라보며 야성의 송곳니를 드러낸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들판을 배경으로 선 주인공 가족의 각각 다른 표정들이 대비된다.


앞부분에 애들 아버지(스티븐 연)가 식구들을 대동하고 이동식 주택에 도착하자 애 엄마(한예리)가 한숨 쉬는 장면이 나온다. 모바일 하우스는 미국에서 빈곤층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이다. 극 중 하우스는 방이 세 개에다 거실도 제법 크고 살 만하다. 가구와 인테리어가 칙칙하긴 해도 시대적 배경인 1980년 대 우리나라 실정에 비하면 영어 표현으로 not bad 다. 미국 가면 거지도 양담배 피운다던 예전 개그가 생각난다.


이름은 미국식으로 바꿔도 식성은 못 바꾼다. 허전해서 더욱 한식에 매달리는가 보다. 배추와 마늘은 근방에서 구하지만 김치의 필수 재료인 고춧가루는 한국 가게에 가야 한다. 바리바리 싸오는 친정어머니의 보따리에 고춧가루가 빠질 수 없다.


대사

영화의 실감을 더해주는 게 대사다. 채널 돌리다 한국 영화가 나오면 줄거리 무시하고 대사만 들어도 재미가 쏠쏠하다. TV 드라마에서, 술 취해서 들어온 아들한테 대비마마 같은 표정으로 '술 많이 했니, 올라가 자라' 하는 사모님의 대사는 작위적이고 느끼하다.


다른 한국 영화에 비해 아기자기한 맛은 적지만, 불안한 매일을 살아가는 가족의 심리가 스며있다. 보통의 이민 1세 가정같이 언어의 조합이 다양하다. 부모는 한국어, 애들끼리는 영어, 애들과 부모는 짬뽕, 어른은 현지 미국인과 어눌한 영어.


실제론 영어 원어민이고 우리말은 좀 서툴다는 주인공 역 스티븐 연이 대사 연습하느라 고생했을 것 같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화난 듯 외마디 영어 몇 단어로만 연결하는 이민자의 답답함이 잘 표현되었다.


미국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로 분류되었다고 분개하는 기사를 보았다. 배경이 미국에다 대사의 반이 영어고 한예리와 윤여정을 제외하고는 배우, 감독 모두가 미국 국적이고 제작자까지 브래드 피트라는데... 영화의 국적 기준이 무언지 모르지만, 나는 한국 영화가 맞는다고 본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인물의 대사가 한국어이고 영화 전편에 한국적인 정서가 흐르고 있다. 평택 미군부대 얘기 영화로 만들면 미국 영화다.


이야기

많이 꾸미지 않은 감독 가족의 경험적 서사다. 기승전결의 긴장감은 덜하지만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탄탄한 스토리, 맥락의 연결 같은 채점 표를 여기 갖다 대는 건 좀 어색하다. TV 드라마에서는 밥 먹듯이 뉴욕으로 날아가지만, 여기선 부부가 영화 내내 아칸소에서 LA로 돌아가는 거 실랑이하다 끝난다. 다만 친정어머니가 겪는 우여곡절이 좀 촘촘하기는 하다. 의료보험이 없었을 텐데 비싼 병원비를 어떻게 했을지도 걱정된다.


연기

극 중 인물이 배우라는 걸 잊을 정도로 몰입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 나는 영화 '데드 맨 워킹'의 사형수 역할 주인공 숀 펜이 실제 범죄자일 거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자꾸 했다. 유명하지 않은 배우가 그런 면에서 유리하다. (나로서는) 평범한 얼굴에 첨 보는 주인공들의 연기가 실감 났다. 들판을 바라보는 스티븐 연의 약간 찡그린 얼굴에 미래에 대한 의지 반, 걱정 반 불안한 내면이 잘 드러난다. 강인하면서 안쓰러운 한국 애 엄마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 한예리의 연기 또한 인상 깊다.


외할머니 역 윤여정의 연기는 언제 봐도 편안하다. 노련한 한국의 연기자에 대해 미국 영화계도 열광하고 있다. 윤여정을 소설가로 치면 박완서에 비교하고 싶다. 자전적 소설을 주로 쓴 작가의 작풍은 일관적이다. 다양한 소재를 발굴해서 쓴 소설가 이병주와 비교된다. 윤여정의 연기에 익숙한 우리들은 예측 가능한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가끔은 심심하다. 욕심이다.






실수로 프리미엄 상영관 표를 사서 '비즈니스 클래스' 의자에 앉았다. 고생하는 얘기를 이렇게 거만한 자세로 봐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어머니가 씨를 가져와 키운 미나리가 이민자의 강인한 생활력을 은유하고 있다. 그런데 요새는 문익점 따라 하면 안 된다. 어느 나라나 식물 종자를 세관에 신고하지 않고 입국하면 불법이다.


오늘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작을 발표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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