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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y 02. 2021

단종의 유배길을 따라가 보았다.

통곡의 길

구글 지도



창덕궁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창덕궁과 창덕궁 근처 금성대군 집으로 옮겨 다니던 단종은 영월로 유배를 당한다.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참형을 당한 이듬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됨과 동시에 금부도사 왕방연이 영월 부 청령포로 호송했다. 1457 년 세조 3 년 6 월의 일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하기 35년 전이다.


왕비와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하고 내시와 궁노, 궁녀 십여 명만 따라갔다. 단종은 정비인 현덕왕후의 소생이므로 강봉되더라도 대군이 붙어야 하지만 그냥 노산이 된 건 현덕왕후가 사후 폐서인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화양정터

단종은 창덕궁을 떠나 화양정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광나루에서 배를 탄 것으로 추정한다. 세조가 내시 안로를 보내 화양정에서 작은 송별 잔치를 베풀었다고 되어있다. 그때 안로가 단종에게 성삼문의 역모에 가담했는지 넌지시 떠보자 단종이 안로에게 술잔을 던졌다고 전해온다. 화양정은 어린이대공원 역 근방 화양동 주민센터 앞 작은 공원에 푯말만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단종 부분은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다. 세조 때 노산군일기로 편찬되었는데 과정도 불투명하고 단종에게 불리하게 손을 탄 흔적이 많다.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단종실록으로 제목만 바꿔 달았을 뿐이다. 따라서 단종의 자취는 야사나 구전에 많이 의존한다. 유배 경로도 마찬가지다. 이 글도 야사, 실록,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조금씩 참고했다.


네이버 앱으로 치면 창덕궁에서 청령포까지 차를 타고 170 킬로미터 두 시간이 좀 넘어 걸린다. 새로 난 광주 원주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원주 근방에서 중앙 고속으로 꺾어 남행하면서 제천 IC에서 빠져나와 38번 국도를 타고 영월 쪽으로 간다.


단종 일행은 화양정 근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이동했을 텐데 영월까지의 경로도 지명으로 더듬어서 유추할 뿐이다. 백성들 눈을 피해 광나루에서 여주까지는 뱃길로 가서 여주 나루부터는 육로로 해서 영월 청령포에 이르지 않았을까 한다.


뱃길과 육로 700리(280 키로) 6박 7일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보다 거리가 먼 건 청령포가 한양에서 천리가 안되어서 먼 거리로 빙빙 돌아갔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경북 영주 남대리에 어래산御來山이라고 있는데 단종이 유배길에 들렀던 곳이라고도 전해져 온다.


유배는 조선시대 5 가지 형벌인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중에서 사형 다음인 유(流)에 해당하는 중형이었다. 유배지는 당시 형법의 기본인 대명률에 의거 최소 2,000 리가 돼야 했으나 협소한 한반도 사정에 맞춰 축소 조정했다고 한다. 유배지로 함경도 벽지나 남해의 절해 고도, 제주도 등이 인기 있었다.


힘없는 밑바닥 백성들의 눈은 맑고 판단은 정직했다. 부당하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을 향한 애통한 마음은 그가 지나는 곳곳에 지명으로 남아 있다. 훗날 역사가 인식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까지는 거의 250 년이 걸렸다.


여주 나루와 영월 청령포를 일직선으로 이으면 원주시 신림면을 거치면서 황둔 마을, 어음정 등 단종이 지나갔다는 지명이 선상에 걸린다. 그 고갯길을 따라가 보면서 왜 영월을 유배지로 정했는지 절로 알게 되었다.


싸리치, 솔치재, 군등치, 배일치 등 높은 언덕을 뜻하는 '치峙'가 유난히 많이 붙어 있다. 산 넘어 산, 유배길 자체가 형벌인 셈이다.


네이버 지도



중앙고속도로에서 ( 제천 IC까지 안 내려가고 ) 신림 IC로 나가 싸리치 고개를 넘으면 황둔 마을이 나오는데 찐빵 동네다. 그냥 지나가기 뭐해서 한 군데 들러서 만두까지 샀다. 원조 찐빵집 바로 옆에 오리지날 집과 찐빵 본관이 있고 건너편에 찐빵 본가가 보인다. 장충동 족발골목이 생각난다.




찐빵 골목을 벗어나서 조금 가면 영월군 주천면에 들어서며 솔치재 고갯길이 시작된다. 영월군에서는 솔치재에서 청령포에 이르는 43 kM 단종 유배길을 정비해놓았다. 단종이 구비구비 넘어 간 고갯길을 재현하는 목적이라면 싸리치 고개 정도는 포함시키는 게 마땅하다. 원주시와 행정 구역이 달라서 그랬나 보다.


수도권 등산로에는 시청 별로 관할 구역이 커다랗게 표시되어있고 구역에 따라 둘레길 이름도 달라 혼란스럽다. 등산객에게는 무슨 봉우리가 중요하지 어느 지자체 관할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전라도 경상도의 남원시, 구례군,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등 5개 시 군이 서로 협력하여 지리산 둘레길을 구역의 구별 없이 일관성 있게 관리하고 있다.


솔치재를 넘어가다 오른쪽으로 빠져 물미 묘원 표지를 보고 올라가면 어음정御飮井이 나온다. 영월 땅에 들어선 첫날 단종이 목을 축이고 갔다는 우물이다. 


정치가 그를 노산군으로 깎아내려도 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임금으로 모셨다. 백성은 똑똑하고 의리도 있다.


우물이 있는 걸 보면 당시엔 마을이 있었나 본데 지금은 공동묘지만 있고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다. 이정표만 보고 가면 놓치기 쉽다. 우물 옆에 단종해갈지처 端宗解渴之處라는 표지석을 세워놓았다.


어음정에서 다시 솔치재 길로 나와 주천으로 내려가면 한반도 면을 가기 전에 군등치 고개가 나온다. 강을 내려다보는 벼랑길인데 가파르다. 단종이 하도 험해 어디냐고 물었더니 호송하던 자가 노산군이 오르시니 군등치君登峙로 부르자 했다는 지명의 유래가 적혀있다. 군君에 임금이라는 뜻이 있긴 하지만 왠지 무엄하다는 생각이 든다.


군등치


영월 한반도면에 들어서면 우래실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단종 일행이 지날 때 백성들이 함께 울었다 해서 울래실 --> 우래실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이 탄 말의 방울이 떨어졌다는 방울재를 넘어가면 배일치拜日峙 마을이 나온다. 마을 끝 집에서 배일치 옛길이 시작되는데 조금 가면 배일치 쉼터에 이른다. 지금은 따로 터널도 파 놓았고 고개를 관통하는 도로도 닦아놓았다.


단종이 서쪽에 지는 해를 보며 떠나온 한양을 향해서 절을 올렸다는 고개다. 회한의 과거 속에 부모 문종과 현덕왕후 그리고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렸을까. 세종은 단종이 태어나자 앞날을 예견했는지 신숙주와 성삼문에게 왕세손을 특별히 부탁했다. 성삼문은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면서도 의리를 지켜 충신으로 남고 신숙주는 다른 길을 택해서 식재료의 이름이 되었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지 사흘 만에 죽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 씨가 자기 친자식인 영풍군과 젖을 나눠 먹이며 어린 단종을 키웠다. 단종은 엄마 같았던 서 할머니 혜빈 양 씨를 무척 따랐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나중에 혜빈 양 씨는 교수형을 당하고 그 아들 영풍군도 유배 중에 살해당한다.



배일치


배일치재를 내려오면 단종이 두고 온 아내 정순定順왕후를 그리워하며 올랐다는 옥녀봉을 지난다. 남편이 노산군으로 강봉 되면서 왕비도 폐서인 되어 옥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단종에게 애가 생길까 봐 왕비를 따라 보내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는 한자가 다르다.


선돌이 보이는 소나기재를 내려가 서강을 끼고 가면 마침내 종착지인 청령포 맞은편에 이른다. 뒤편으로는 높은 산과 절벽이 있고 앞으로는 휘돌아가는 서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다름없이 배를 타야 드나들 수 있는 천연의 유배지다. 소나무가 우거져서 풍치가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다.


청령포 영월군청 홈페이지


청령포에서 단종은 약 두 달 정도 살다 홍수가 나서 거처를 관풍헌으로 옮긴다. 영월 읍내 중심가에 있다.


조선시대 고관들 중엔 유배지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 중앙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방 수령도 유배자를 무시하지 못하고 나름 대접했는데 단종은 영월 부로부터도 홀대를 받은 것 같다. 근방 금강정 같은 곳에 소풍하는 것까지 간섭했다고 한다. 살아있는 권력의 눈치를 봐가면서 알아서 기는 얍삽한 처신이다.


조정에서는 공신들을 중심으로 줄곧 단종의 처단을 주장하고 세조는 몇 차례 밀당을 연출하다 마지못한 듯 사약을 내리고 만다.


단종을 영월로 호송하고 돌아갔던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번엔 사약을 들고 관풍헌에 나타나서 부복했다. 단종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왕방연은 엎드려 차마 대답을 못한다. 단종이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고 하기도 하고, 단종의 시중을 들던 복득이란 놈이 활시위로 단종의 뒤에서 목을 조르고 자신은 나가 자결을 했다는 설도 있다. 세조가 내린 형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정축년 1547 년 시월, 유배 간 지 넉 달만이었다.


단종의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관풍헌에서 동강은 걸어서 십 분도 안 걸린다. 영월 관아의 호장 엄홍도가 밤중에 시신을 거두어 암매장 했다. 발각되면 멸문당할 위험을 무릅쓴 엄홍도의 충정을 기려 훗날 숙종 때 공조참의를 추증했다. 단종을 복위하면서 묘소의 능호는 장릉으로 정했다. 영월읍 근처에 있다. 조선왕의 능묘 중 유일하게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있다. 제주에서 유배 중에 죽은 광해군의 묘도 경기도 남양주에 있다.




왕위 찬탈과 단종의 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세조의 계획대로 치밀하게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비고비 변수가 있었다.


세조에게 일찍이 왕권에 대한 야욕이 있었던 건 분명하지만 일단 단종이 즉위한 다음엔 중국 주나라 주공의 역할을 하는 힘 있는 왕족으로 만족하고 살아갔을 수도 있다, 옆에서 모사꾼 한명회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말이다.

주공 : 무왕을 도와 상(商)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우는 데 절대적 공헌을 하였고, 무왕 사후에는 어린 조카 성왕(成王)을 보좌해 섭정하면서 각종 문물 제도와 예악(禮樂) 질서를 정비해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음. 공자(孔子)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성현(聖賢) 중의 성현.
[네이버 지식백과] 주공 [周公] (열국지사전, 2001. 6. 15., 풍몽룡, 김구용)


왕권을 접수한 후에 단종을 강봉시켜 영월로 유배시킨 건 역사에서 낯설지 않은 수순이다. 하지만 신하들이 나서서 단종을 없애자고 끈질기게 조르지 않았다면, 세조는 집안의 어린 종손을 죽인 삼촌의 오명만은 피했을지도 모른다. 죄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죽이냐고 하자 정인지는 죄가 없으니까 죽여야 한다는 흉악한 주장까지 한다. 떳떳지 못한 일을 저지른 임금과 간신들이 후환을 두려워하면서 연쇄적으로 죄를 지었다.




호장 엄홍도 기념관에 세운 공적비                                 영월 장릉에서 단종 헌다례를 하고 있다 (영월 문화원 유튜브 2021.5.1.)


장릉 옆에 있는 호장 엄홍도의 공적비에는 그가 했다는 말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위선피화 오소감심 爲善被禍 吾所甘心 :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입더라도 달게 받겠노라.


당시 간신들의 심정을 짚어 나도 한 수 거든다.

위악피택 고두공률 爲惡被 叩頭恐慄 : 나쁜 짓을 해서 입은 은덕에 대가리를 조아리며 부들부들 떤다.






이번 주말 삼일 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영월군에서는 단종문화제를 개최한다고 부산하더라. 

있을 때 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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