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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11. 2021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에 갔다 오다.

해남-보길도-완도 기행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창파에 실컷 배 띄워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 세상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에서


교과서에도 실려있던 윤선도의 시조에서 생각나는 부분은 오직 '지국총 어사와' 다

좋은 구절 다 놔두고 의성어 후렴구만 남았다.


망망대해 일엽편주에 목숨 걸고 고기 잡아 연명하는 어부를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사는 존재로 미화했다. 

화자와 세속 간에 거리가 느껴진다. 망국의 설움을 안고 섬으로 피세한 윤선도는 인간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뱃사람이 부러웠을 수도 있겠다.


말도, 물고기도 살이 오르는 가을에 남쪽 끄트머리 섬 보길도를 찾은 이유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유배 사적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일전에 영월에서 단종의 유배길을 좇아가 보고 나서 유배지에 관심이 생겼다.




집에서 보길도 가는 최단거리를 찍어보니 해남을 거쳐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되어있다. 해남엔 윤선도의 가문인 해남 윤 씨의 종택宗宅과 윤선도 유물 전시관이 있다.


녹우당이라고 부르는 종가엔 아직도 후손이 살고 있는데,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경기도 수원 집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효종이 어려서 윤선도에게 배운 인연이 있다. 대통령이 스승의 날 중학교 때 담임 선생님한테 신도시 아파트 한 채를 선물로 드린 식이다. 집을 선물한 임금도, 천 리 길을 옮겨 지은 신하도 참 통 크게 놀고 있다. 호남에서 제일 오래된 민가라고 한다. 


이곳에 와서 윤선도가 보길도에 유배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은거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남 녹우당


숲의 나뭇잎이 비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붙였다는 녹우당綠雨堂 이름이 운치 있다. 녹우당은 입주자 사정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었는데 요즘은 어디 가나 닫혀있는 시설이 많다.


옆에 붙은 고산 유물전시관에 들어가 본다. 고조할아버지 윤효정이 해남 부잣집에 장가 와서 집안을 일으키고 해남 윤 씨의 득관조得貫祖가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광개토대왕인 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유물전시관은 고산보다는 윤 씨 집안의 홍보관 같았다. 가보에 단골로 등장하는 교지敎旨, 초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훗날 정약용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할 때 외갓집인 윤 씨 집안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근방에서 플라스틱을 태우는지 역겨운 냄새가 끼쳐와서 얼른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농촌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일이 흔한데 불법이다. 드럼통에 때려 넣고 태우기가 편해서 그런지, 지자체에서 쓰레기를 잘 안 가져가서 그러는지 신선한 공기를 환경 호르몬으로 스스로 오염시키고 있다.


보길도 들어가는 배 시간이 다 되었다. 해남 땅끝 마을로 달린다. 이미 조선 시대 문헌에 남쪽 기점을 해남현으로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어떻게 땅끝임을 알았는지 신통해하는 순간 나는 선조의 과학 수준을 띄엄띄엄 보고 있다. 그래도 옛날에 어떻게 제주도가 있는 걸 알았을까 궁금해하는 집사람보다는 낫다. 땅끝 마을에서 보길도 향하는 이정표를 따라가니 선착장이 나온다.


배를 기다리는 차의 줄이 듬성듬성하다. 터미널에 들어가 자동차와 사람 배표를 따로 끊었다. 주민증은 필수이고 전화번호, 차량 번호를 속사포처럼 물어보는데 더듬거리면 안 태워줄 것 같다. 내 차례가 오기 전에 속으로 한 번 연습했다.


차를 몰고 들어가 선창에 주차하고 선실로 올라가는데 차 속에 꿈적 않고 앉아 있는 이들이 많다. 차에서 나오라고 방송해도 버티는 그들에게서 빠꿈이 (=전문가)의 경륜과 자신감을 느낀다. 선실은 텅텅 비어있고 텔레비전만 혼자 잉잉거리고 있다. 선실을 지역주민과 외지인 용을 분리해 놓았는데 아마 코로나로부터 지역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보다.


배에 '농협' 로고가 보인다. 농협과 여객선이 얼른 연결이 안 되는데 영리보다 안전이 우선인 여객선 사업을 공적인 사업체에 맡기자는 취지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삼십 분 정도 배 타고 가서 노화도에서 내려 육로로 다리를 건너면 보길도에 닿는다. 행정구역으로는 완도군 보길면이다. 섬이 행정적으로 육지나 다른 섬에 소속되는 게 왠지 섭섭하다. 섬은 크기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대우해 줘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본다.


병자호란 중 왕이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보를 윤선도는 해남 종가에서 들었다.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노복과 가솔을 거느리고 제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풍수와 산세가 범상치 않은 섬을 발견하고 터를 잡은 게 바로 보길도라고 한다. 그의 나이 약 50세쯤이었다. 


보길도에 셀프 유배 온 셈이다. 그 후 윤선도는 벼슬과 유배 기간을 빼고는 여생을 보길도에 머물면서 탁월한 문학적 역량으로 어부사시사, 오우가 등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풍수를 보는 안목으로 부용동 원림이라는 별서別墅 정원을 조성했다.


이번엔 여행하면서 한 곳을 제외하고는 숙소를 예약 없이 현장에서 정했다. 언젠가 미국 요세미티에서 만난 호주인 부부에게 들은 건데, 두 사람 정도 잠자리는 여행지에 도착해서 구해도 되더라는 것과 다만 여의치 않으면 다른 데로 뜰 수 있게 오후 세시 이전에 도착하는 전략이다. 대신에 보상받는 일정의 자유는 소중하다. 주말을 피해 다니면 더욱 안전하다.


우리는 저녁때가 다 되어 예송리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잔디가 푹신한 한옥 민박집에 들었다. 예송 마을이 섬에서 제일 예쁜 해안이라고 자랑하는 주인한테 혹시 예송禮訟 논쟁할 때 그 송訟자냐고 물으니 소나무 송松자란다.


보길도 예송리 앞바다


윤선도는 효종 사후에 왕의 계모가 상복 입을 기간을 가지고 논쟁하다가 유배를 간 적이 있는데 이른바 예송禮訟 (논쟁)이다. 조선시대엔 별 걸 다 가지고 당파 싸움을 했다고 조롱할 건 아니다. 왕권과 신권 간의 정치적 갈등이 복상 기간으로 표출되었을 뿐이다. 인조의 첫째 아들인 소현 세자가 일찍 죽자 왕위를 물려받은 차남 효종의 장례 절차를 가지고 정파 간에 다투었던 사건이다.


효종을 장남으로 대우해서 계모가 상복을 삼 년은 입어야 마땅하다는 남인과, 차남으로 쳐서 일 년 만 입어도 된다는 서인이 충돌했는데 어찌 보면 왕의 적통과 연결되는 민망하고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남인인 윤선도는 반대파인 서인의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효종의 덕을 그렇게 봤으면서도 의리 없이 임금의 출신을 따지는 듯한 주장을 펴는 게 얄미워서 격분하다가 귀양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 사회도 작년에 한 정치인의 장례를 삼일장이냐 오일장이냐 하면서 시끄러웠다. 멀리 갈 것 없다.


윤선도와 송시열은 서로 정적이 되었지만 효종과 현종이 어린 시절 함께 가르친 동료 교사이기도 하다. 나이는 고산이 스무 살이나 많은데도 송시열을 선배로 상상하는 이유는 흰 수염을 달고 노숙하게 앉은 그의 초상 때문일까? 송시열도 나중 숙종 때 ㅇ제주도로 귀양 가다가 보길도에 들러 바위에 시문을 새겨 놓았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글씐 바위'라고 불린다. 참 아름답고 직관적인 이름이다.

글씐바위/ 송시열 암각시문

내용은 약간의 신세 한탄과 임금에 대한 그리움이 섞여있는데 유배지에서 쓴 작품(유배가사流配歌辭)들이 대개 그렇다. 무고함을 토로하면서도 주군에 대한 일편단심을 잊지 않는 공통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너그러운 사면을 기대하면서 적어도 유배지에서 졸지에 사약을 받는 일만은 피해야 하는 절박함이 깔려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교도소 담장을 걷는 극한 직업이다. 시기로 보아 고산이 죽은 다음이라 두 사람이 조우하지는 않았겠지만 재미있는 인연이다. 섬의 동쪽 외진 끝에 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고산이 은둔하면서 유유자적 자연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어 놓았다는 원림을 찾았다. 


원림園林이란 순수 자연은 그대로 둔 채 거기에 최소한의 인위만을 가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정원庭園과 다르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의 원리와 단순함으로 질박하게 지었다는 세연정이 기대되었는데 역시나 닫아걸었다. 코로나 방역 단계는 수도권이 엄한데 체감하는 정도는 지방도 만만치 않다. 곳곳에 군민들에게 여행을 자제하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원림으로 통하는 샛길을 물어보던 다른 일행은 현지 주민에게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지금 이 시국에 놀러 다니는 사람들 이해를 못 하겠다나 어쨌다나...


낙서재와 곡수당


평생, 유배 20년, 은거 20년 했다는 고산의 시문을 보면 유교와 도교의 철학이 공존하면서도 유학자로서 도교 사상이 선을 넘지 않도록 조절했다. 죽림칠현처럼 절대가치를 배격하는 무위자연의 도피가 아닌, 유교적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벼슬과 유배 막간의 피세를 선택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보길도에서 화려하고 여유롭게 은거하면서 고고한 기상을 지키는 한편 서정적인 예술을 창작할 수 있었다.


원림 앞길을 지나 한 2kM 정도 가면 고산이 말년에 머물면서 책 읽고 후손을 가르쳤다는 낙서재樂書齋가 나온다. 여기는 산기슭에 한적한 곳이라 그런지 개방되어 있다. 우리는 낙서落書가 먼저 생각나는데 글 읽고 공부하는 게 즐거운 낙서樂書다.


'보길도 최고의 양택지'라는 안내판을 보고 검색해보니 무덤(陰宅)에 대비해서 주거지를 양택陽宅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생시와 사후의 거처를 음양으로, 단순 수평적으로 대비한 관점이 재미있다.


주위 경관을 놓치지 말고 보게끔 퇴(마루)가 사방으로 집을 둘러싸고 있다. 그도 모자라 집 앞 내리막에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있다. 고산이 앉아 달구경(玩月) 했다고 한다. 근처에 고산의 아들 학관이 공부했다는 한 칸짜리 곡수당이 따로 있다. 재주 많고 지체 높은 부잣집 양반의 신선놀음 현장을 보는 듯하다.


낙서재를 되돌아 나와 600 M 정도 가면 산 중턱에 바위를 딛고 서있는 멋들어진 정자가 보이는데 동천 석실이다. 고산의 유적인데 역시 코로나 때문에 올라가는 입구를 막아 놓았다. 개방과 폐쇄의 기준을 헤아리기 어렵다.


고산이 뱃머리를 돌릴 정도의 특별한 풍광을 느끼지 못한 채 난대림이 우거진 섬 보길도를 떠났다. 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격자봉에 올라갔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색색가지 펜션 간판 뒤에 가려진 산수화를 놓친 걸까





보길도를 떠나서 완도로 나왔다. 완도는 주위 섬들과 이리저리 다리로 연결되어 육지로 통한다.


완도와 붙은 신지도와 고금도는 조선시대 인기 유배지였다. 대명률을 (미련하게) 그대로 적용해서 좁은 땅에서 3천 리 유배 거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궁여지책이 바다를 한번 건널 때마다 천리로 쳐주는 변통이었다. 고금도는 2천 리, 신지도는 3천 리 이런 식으로...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을 비롯해서 40여 명이 완도 지역으로 유배 왔다고 한다. 대개 중앙에서 쫓겨온 유배 죄인들은 절해 고도에 한양의 학문과 정신문화를 전수하면서 지역 주민과 공생했다. 


지금 지자체는 유배지를 복원해서 문화 관광 자산으로 활용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이도재 공 적거지다. 고금도 성당 근처에 있다.


고금도 이도재 공 적거지

갑신정변 때 종신 귀양살이 벌을 받아 고금도로 유배 온 이도재 공은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쌀과 보리의 바른 재배법을 가르쳤으며, 고구마를 주식 대용으로 먹을 수 있음에 착안하여 보급하는 데 힘썼다. 섬 지방의 특성을 살려 김 양식 방법을 연구하고 꼬막, 바지락 등의 조개류와 해조류의 양식에도 손수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유배지로 잘 못 알고 들어간 보길도에서 나오는 길에 그나마 유배인의 흔적을 한 군데 찾아본 걸 다행으로 여기며 육지로 발길을 돌렸다.




이정표에 강진 가는 길이 계속 튀어나와 유혹을 받았지만, 정약용 형제의 기록을 좀 더 연구한 후 다시 오기로 맘을 달래며 직진했다. 그때 시간이 되면 보길도에도 다시 가서 이번에 허탕 친 원림도 둘러보고 동천 석실 거쳐서 격자봉에도 올라가 섬을 차분하게 재평가해 드리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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