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이야기
독서록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미치 앨봄 지음 / 공경희 번역 )
자네에게 진정으로 만족을 주는 게 뭔지 아나?
자네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p 194
우리 독서 동아리에서 읽을 책으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선택한 이유가 새삼스레 죽음을 진지하게 사유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읽은 사회·자연 과학 책들의 주장들에 대해 무릎을 치며 탄복했고, 때로 저자의 영민함을 시기해서 내용을 비틀어가며 생떼도 부려보았다. 그러면서도 껍질 속에 숨어서 먹이를 먹고 뱉는 갑각류처럼 우리는 오만하게 지식의 취사取捨를 선택할 뿐 정작 자신은 불변의 상수로 붙들어 매 놓고 꿈적하지 않았다. 갑각이 닫히기 전에 우리도 연한 속살을 조금 내어놓고 파도와 바람에 흔들려 보기로 했다. 밋밋한 지식과 정보의 거래를 넘어 책에 의해 생각이 바뀌고 인생이 달라지는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동아리의 늙은 벗들에게 새로운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엔 통하지 않았던 메시지를 이제 꼰대의 입장에서 다시 읽고 감수感受하는 계기가 된다면 성공이다. 읽기가 쉬워서 한 줄의 해석 가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할 걱정도 없고 분량도 짧다.
이 책의 주인공인 모리 교수와 저자 미치 앨봄은 둘 다 유태인이고, 모리 교수를 처음 세상에 소개한 TV 프로 '나이트 라인'의 진행자 테드 코펠 또한 유태계다. 일에 대한 열정, 교육열로 대표되는 유태인의 특징을 이 책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다.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모리 교수는 기왕이면 죽음을 가치 있는 일로 승화하기 위해 남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기로 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알면 자연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된다는 책의 화두가 여기서 시작된다. 한편 미치 앨봄은 신문에 실린 자기 기사로 인해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정신없이 바쁜 저널리스트다. 대학 시절의 사제지간이라는 인연을 제외하고는 도저히 접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두 사람이 재회한다. 한 사람이 죽기까지 14주일간 화요일마다 편도 1,000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극복하며 주고받은 인생 수업의 기록이다.
대개 죽음은 비공개다. 모리 교수는 동물들이 섹스를 공개하듯이 자신의 죽음을 매개로 삶의 레종데트르Raison d'être ( 프랑스어로 '존재의 이유')를 세상에 설파한다.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 좌절과 낙담이 아니라 희망과 삶을 얘기한다. 처음엔 선듯 받아주는 출판사가 없었다는 죽어가는 우울한 이야기가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었다고 한다. 제1호가 책의 저자인 미치 앨봄이다. 그는 첫 화요일부터 달라지기 시작하며 모리 교수가 남은 날을 가치 있게 보내는 걸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거품에 가려진 인생의 진실된 가치를 찾아내는 두 달 남짓의 여정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개념도 동행한다.
우리 동아리에서 다룬 소주제들 중에서 세상과 죽음, 그리고 후회 / 나이 드는 두려움 / 용서에 대한 감상을 소개한다.
사랑은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
p105 / Kurt Lewin
모리 교수는 당시 유럽 보스니아 전쟁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운다. 미치 앨봄은 언론 취재 중에 죽음의 현장을 직접 보고도 울어본 적이 없다. 모리 교수는 자신이 불치병을 앓으면서, 모르는 사람의 고통을 공유하고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고 고백한다.
죽음을 가지고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죽음으로 생물학적인 삶은 끝나지만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라는 모리 교수에게서, 미치 앨봄은 죽어가는 모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건 죽음보다도 잊혀가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노인이 되면서 생기는 생활 질환 중에 절박뇨切迫尿 ( 병명 참 찰지게 지었다!)가 있다. 오줌을 참지 못하는 병인데 눈물도 그렇다. 요즘 들어 눈물이 흔해졌다. 다른 사람 우는 것만 봐도 눈물이 새어 나온다. 내가 이 주책성 신종 노인 질환을 절박루切迫淚 로 작명했다. 노인일수록 세상에 관심이 많고 공감 능력도 증식되는데 오지랖으로 몰리기도 한다.
레빈 Lewin이 정의한 사랑에 정신이 버쩍 든다. '제일'도 아니고 '유일하게 이성적인...'
동아리
세상을 헤쳐가는데 필수로 여기는 이기적인 기질의 궁극은 결국 사랑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내일 죽는다 해도 실천하기는 힘들다.
동아리
결국 본능과 이성은 하나가 아닐까.
동아리
죽게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단 말이야.
만일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텐데...
p 139
살면서 자신의 죽음이 예고되면 삶의 거품이 걷히고 핵심이 보인다. 삶이 달라지고 사람도 달라진다.
불가역한 죽음이 초래하는 이별은 피차를 슬프게 하지만 결코 죽음 자체는 불행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질병이나 사고가 고통스러울 뿐이다. 책 중에서 모리 교수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부가 의문문 식으로 단정할 때마다 미치 앨봄은 부정한다. 아직도 죽음은 불행이고 타인의 불행을 맞장구치며 인정하는 건 야박하다.
누구나 죽기 전에 정리를 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모리 교수 그리고 미치 앨봄까지 후세에 무언가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에 매우 안도하고 있다. 다른 불치병에 비해 암이 각광? 을 받는 이유는 말기 환자에게 최소한의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때문이다. 모리 교수는 그 기간에 신들린 듯한 열정으로 논문 쓰듯이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고 떠난다.
졸업 후에도 이어지는 사제지간의 정은 동양적이지만,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회학자와의 대화를 기록해서 적극적으로 발간하고 치료비에도 충당하는 건 참 미국적이다.
동아리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는데 다들 그런가? 나는 잘 때 내일이 안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한 때는 희망한 적도 있는데...
동아리
ㄱ. 모리가 '너무 빨리 가지 마라, 너무 매달리지도 마라'라고 한 건, 자신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지라는 게 아닐까, 말은 안 했지만?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수동적으로 태어났지만, 적어도 요즘 세상엔 생의 마감은 자신이 관여해서 통제하는 게 온당할 듯하다,
ㄴ. 자살?
ㄱ. 몇 나라에서 허가하는 안락사 같은... 이제 조만간 시대에 맞는 제도가 생기겠지.
ㄷ. 의술이 발달해서 수명이 한없이 연장되는 세상이 오면, 자신의 수명을 꼭 의술에 맡기지 않고 능동적으로 조절하게 될 것임. 마을버스에서 내릴 사람은 벨 누르고, 더 갈 사람은 앉아있고. 굳이 모든 승객이 종점까지 가는 건 죽지 못해 사는 거와 다름이 없잖아. 곡기를 끊고 스스로 죽은 스캇 니어링 Scott Nearing이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칭송받는 이유야. 아마 지금도 죽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복잡하지 않으면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삶을 포기한다기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
동아리
ㄱ. 사후에 환생, 부활, 영혼의 불멸을 믿나?
ㄴ. 안 믿으면 죽은 후에 모든 게 끝이라는 얘기야?
ㄱ. 설사 사후 세계가 있다고 해도 현생의 나를 사후의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두 개의 나는 서로 남이고, 현생의 나는 끝나는 게 아닌가?
ㄷ. 모리의 비유를 생각해 봐: 파도가 부서져 없어지지 않고 바다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처럼 죽음도 끝이 아니고 우주에 환원되는 거야. 질량의 총량은 불변이니까 죽음은 우주에서 다른 형태로 이어질 테고.
ㄱ. 우주 만물은 쉬지 않고 순환한다는 대자연의 이치에 대들면서까지 끝이 있는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가 좀 불편할 수는 있지.
동아리
후회
통상 죽기 전에 한다는 후회를 보면 치부, 출세 같은 세속적인 성취가 아닌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 (서양철학이 아닌 동양 고전적 정의에서)인 영역이다. 예를 들면, (나 자신이 아닌) 남에게 보여주는 삶, 가족과의 시간, 할 말 제대로 못하고 산 것 등. 모리 교수도 사소한 것들만 쫓으며 산 것을 후회하고 있다.
삶이 전부였던 때와 죽음이 훅 치고 들어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평가하는 삶의 구성 요소별 가중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ㄱ. 꿈이 없이 중요하지 않은 급한 일상에 낭비하며 중대한 가치를 추구하지 못했던 게 후회됨. 젊은 사람들에게도 같은 조언을 하고 싶음.
ㄴ. 죽는 사람들이 만일 다시 삶을 산다면 과연 후회를 보상하면서 살까? (돈으로 대표되는) 물질의 다다익선적인 가치에 매몰된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은, 자기의 분신인 아들에게 죽을 때 한 푼도 못 가져가니 돈을 돌같이 여기고 살라고 유언할까?
ㄱ. 죽음에 가까이 갔을 때만 깨달을 수 있는 삶의 가치가 있다. 이때의 후회를 새겨들으면 잘 살 수 있음.
ㄴ. 삶의 가치를 알기 위해 꼭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 죽을 때의 결론이 중간 결산보다 우월하다는 보장이 있나?/ 혹시 개량할 삶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마냥 비현실적인 개선안을 남발하는 건 아닐까? 남이 할 일에는 가혹하고 엄격한 기준을 강요하는 것처럼.
ㄷ. 죽음이라는 답을 알면 삶의 문제가 다른 식으로 풀린다는데, 정답을 알고 역산해서 추론한 문제 풀이가 최선의 해법이 아닐 수도 있음.
동아리
나이 드는 두려움
수명이 늘면 병이나 부상으로 인해 활동하지 못하는 장애 기간도 비례해서 는다. 보통 기대 수명을 80세 정도라고 치면 장애 기간이 약 15년 정도 된다고 한다. 기껏 늘어난 수명을 침대에 누워 병치레하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장수는 의미가 없다. 사회의 노인 복지 비용 부담도 가중된다. 선진국일수록 건강수명에 신경 쓰는 이유다.
삶의 양量과 삶의 질, 두 조건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말기 환자에게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를 계속할지 아니면, 편안하고도 인간답게 임종을 맞이하는 호스피스로 전환할지 무서운 선택을 강요할 때가 있다. 점점 사회는 양보다 질 쪽으로 기울고 있다. 굵고 짧게 살다 가자는 얘기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나중에 아파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을 때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미리 밝혀두는 서류다. 종합병원 등 국가가 지정한 기관에 가서 등록하는데 예약이 몇 달씩 밀려있다. 뜨거운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노년에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데 엉덩이를 남에게 맡기는 지경에 이른다. 책의 첫머리에서 모리 교수도 어느 날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다고 했다. 자신의 배설물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을 죽음만큼 피하고 싶다. 우리들 대부분은, 불행하게 급사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돌봄에 의지하는 과정을 길든 짧든 거쳐서 죽게 되어있다.
늙고 아프면 가족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70%가 넘는 노인 환자의 똥오줌을 가족이 아닌 간병인이나 요양사가 받아내고 있는 게 '불편한 진실'이다. 노년의 돌봄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 전희 경외/봄날의 책)를 보면, 환자 본인부터 가족보다 관계의 역사가 없는 남에게 맡기는 걸 되레 편안해한다고도 되어있다. 가족이 포기하고 전문가에게 넘긴 돌봄 서비스의 표준을 아직도 '가족처럼'에 맞추는 현실을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내가 남에게 의존하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는 점이야.
.........
누군가 목욕을 시켜주고 들어서 안아주고 엉덩이를 닦아주니까 마치 아기로 되돌아간 것 같아.
.......
난 그 걸 즐기는 방법을 기억해 내고 있는 중이야.
P 182
모리 교수는 두려워했던 상황이 닥치자 그 상황에 빠져듦으로써 두려움에서 걸어 나온다. 무서운 것을 그려보면 무서움이 가신다는 브런치 작가 insaengwriting https://brunch.co.kr/@insaengwriting 님이 생각난다.
78세의 말기 환자가 어른으로서 내주는 동시에 아기로서 받으면서 순환의 도리와 이치를 가르치고 있다.
피조된 인격체의 원형인 어린아이로 돌아가서 평화를 찾는 것이다.
용서
죽기 전에 자신을 용서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도 용서하라.
p 240
ㄱ. forgive용서를 파자破字하면 '위하여 주는 것'이 됨. 예수가 죽음과 부활을 세 번 말씀하신 것이 십자가를 통한 용서를 뜻함. 용서를 참회와 회개의 뜻이 있는 contrition 로도 표현하는 데 용서의 주체가 용서받는 행위를 암시하고 있음.
ㄴ. '사랑'을 be level with ( 같아지다, 恕 )로 풀이한다면, 남의 처지가 되어 이해하고 동정하는 용서容恕와도 맥락이 통함. 사랑과 용서는 상통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함.
ㄷ. 책에서, 용서는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용서로 시작한다고 하는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용서가 잘 연결되지 않음. 동서양 성인들은 모두 용서를 강조하지만 실천이 어려운 덕목임.
ㄹ. 그 이유는 용서가 바로 자기중심을 포기하는 행위이기 때문임. 용서와 사과는 동질적임. 서둘러야지 내일이면 용서의 상대가 없어질 수도 있음.
ㄷ. 나이 먹으면서 거꾸로 용서의 채무가 늘어가니 한심함. 고만하세, 이 얘기 더하면 울 것 같아.
동아리
모리 교수는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갖게 되니 한편으로는 멋진 일이라고 한다.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미리 알고 사는 건 슬프고도 어이없지만, 그래도 인생을 정리할 시간이 주어지는 건 불행 중 다행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누린 복락에 감사한다면 머물렀던 자취를 정돈하고 마무리하는 게 예의다. 중요하고도 어려운 마무리가 화해와 용서다.
서로에게 주고받은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털고 일어나는 일이 어렵다.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평소에 하나하나 털어내도 되지만 결국 끝까지 놓지 못하고 안고 간다. 심지어는 자식들에게까지 불구대천의 원수不俱戴天之怨讐를 상속하며 업보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리는 사람도 있다.
아직 단언하기는 뭐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우연이라고 믿기에는 우주란 너무나 조화롭고 웅장하고 압도적이군.
p 17
ㄱ. 그런데 모리 교수는 죽기 전에 '우연이라고 믿기엔 조화롭고 웅장하고 압도적인 우주'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했을까?
ㄴ. 우연적 존재가 아니면 지적 설계(자) 론을 암시한 건가 이 양반이?
ㄷ. 설마...
동아리
ㄱ. 모리 교수는 평생 남을 가르치며 살다 가면서도 후세를 위해 주옥같은 교훈을 주고 떠났어. 생명의 마지막 불꽃까지 태우면서 베푸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에 충실했지.
ㄴ. 모리 교수의 묘비명이 뭔지 알아? 'A TEACHER TO THE LAST 마지막까지 스승이었던 이'
ㄷ. 그런데 , 우리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아직 죽을 날도 많이 남아있는데 ??
동아리
동아리를 마치고,
나의 모리 교수는, 그리고 미치 앨봄은 누구일까 생각하며 카페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