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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l 24. 2021

헤어지는 게 서투른 우리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빠빠빠로 시작하는 딕 패밀리의 경쾌한 보컬 '또 만나요'는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에서 영업 끝나는 시간이면 틀어주던 귀에 익은 곡이다. 요새 코로나 방역으로 이 노래가 다시 나오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QmLAyp-tJY




아이와 늦은 밤까지 함께 텔레비전 보는 집도 있지만, 일찌감치 잠자리로 내쫓는 추세고 그러는 게 바람직하다. 나도 어려서 일찍 잠들기 싫었다. 불을 끄고 엄마가 다그쳐야 마지못해 누웠다.


새벽에 일찍 깨서 하루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게 지루했다. 먼동이 희붐하게 밝아오면 부엌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위에 걸려 있는 채색 동양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로로 길쭉한 그림 속 새 두 마리가 가지 사이를 깡총 옮겨 다녔다. 분명히 새들이 날개도 피지 않고 번갈아 움직였다. 날이 밝고 식구들이 깰 때까지 그림 속의 새들이 같이 놀아주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잠자기 싫었던 이유는 외로워서다. 온 식구가 방 하나에 나란히 누워 있어도 눈 감으면 그들과 떨어져 혼자가 되었고 서운했다. 아이들이 안 자려는 건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더 놀고 싶어서라는데 부모와 떨어지기 싫은 애착 때문에도 그렇다고 들었다.


대상과 떨어짐으로 인해 생기는 불유쾌한 심리적 상태인 분리 불안은 강아지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닌가 보다. 아이나 어른이나 우리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해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거울처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 정서의 원형이자 본성이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활동은 만나는 인사로 시작해서 헤어지는 인사로 끝난다. 인사 풍속風俗은 구성원과 분리되기 싫은 본성에 기초한다.


사람을 마주 대하거나 헤어질 때 친밀감을 표하는 예절로서 인사는 만나면 반갑고 헤어질 때 섭섭함을 표현한다. 그 순환이 자주 반복되는 식구나 동료도 있고 어쩌다 한 번인 관계도 있다. 순환의 횟수가 쌓일수록 마지막 이별은 각별하다. 부부간의 사별은 다시 만날 기약이 없는 이별이기에 애달프다. '나 혼자 어찌 살라고...' 하는 통곡은 분리되어 혼자 남은 쪽 위주의 솔직하고 현실적인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


인사가 마음에 우러나지 않고 형식으로 흐르면 '치레'라는 꼬리가 붙는데 그 꼬리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인사에서 거품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헤어질 때 인사는 만날 때 보다 복잡하고 어색하다.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이에도 또 보자는 말이 편안하다. 언제 점심이래도 한번, 소주 한 잔, 한번 찾아와, 전화해 따위의 빈말과 희망이 뒤섞여 분간이 안 되는 말을 곧이듣고 행동에 옮기면 썰렁해질 수 있다.


집에 왔다 가는 손님을 배웅할 때 바로 휙 돌아서면 야박하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서로 붙들고 주고받는 대화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나 집안에서 이미 한 차례 했던 얘기들이다. 밤 깊어 가는 집 앞 공터에서의 송별 의식은 동서양 공히 삼십 분이 기본이다, 이제는 바뀌고 있지만.


해외에 있는 친지를 방문하고 귀국할 때는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해야 한다는 다짐을 적어도 열 번 이상을 반복한 후에야 발걸음이 떨어진다.


비즈니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래처와 헤어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회의 중에 이미 약조하고 합의한 일거리들을 (중요하지 않아도) 줄줄이 복기한다. 별로 친한 관계도 아니면서 서로 다시 만나게 되어 있는 다음 기회를 용케도 찾아내고 천만다행이라는 듯 안도한다.


위에 소개한 딕 패밀리의 빠빠빠 노래도 '다음에 또 만날 날을 약속하면서 이제 그만 헤어져요'로 끝난다. 또 만남을 가짜로 기약하는 조건부 헤어짐으로 이별의 고통을 달래주고 있다.




반갑고 섭섭한 감정이 사람의 본성인데 혼자 있고 싶고 낯선 이를 경계하는 마음은 어찌 된 것일까. 티브이에 나오는 홀로 사는 '자연인'이 인기 있다던데 태생적으로 자연인으로 프로그램되어있지 않은 인간이 자연인 프로그램을 즐겨 찾는 이유는 무얼까. 몇 대에 걸쳐 한 집에 사는 대가족 제도가 무너져서 핵가족으로 분열되고 남과 담을 쌓고 혼자 먹고 마시는 혼자 족이 늘어나고 있다.


본성과 감정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본성이 진화하는 중인가?

현대 사회의 만나고 헤어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 물량을 감당할 만큼 우리 인간이 충분히 진화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본다. 만나면 같이 지내던 석기시대 수준의 진화와 팽팽 돌아가는 현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만남과 헤어짐 (특히 헤어짐)에 익숙하지 않고 연습이 덜 되어서 과정이 어색해지니까 불필요한 동작과 공허한 말로 공백을 메꾼다. 만일 본성이 진화해서 현실을 따라잡는다면 인사에서 '치레'가 떨어져 나가고 남는 게 별로 없어 간단하기는 하겠지만 세상은 맹숭맹숭할 것 같다.


아니면


본성을 회복하는 중일까?

인간의 마음은 그릇이며 본성은 그릇에 담긴 물과 같다고 했다. 율곡 이이의 말인데 맑은 물이 현실이라는 그릇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바뀌고 굴절된다는 얘기다. 본성은 또 다른 본성과 충돌하기도 하고 현실의 잡다한 사정과 그로 인한 감정을 통해서 변이 變異가 나타난다.


그러나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듯이 원초적이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의식인 본성은 항상 깨어 있다. 마음의 때를 닦아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수행修行이다. 감정으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속박을 벗어나려고 되풀이하는 단계이다. 수행에 닦을 수修 자가 들어간다.


길에서 모르는 이를 보고 웃어주는 서양 사람의 예절엔 본성을 지키려는 강제적 규범이 남아 있지만 억지 웃음으로 얼굴 근육이 아프다. 엘리베이터에서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고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 젊은이는 현실 감정에 충실하지만 침전되어 있는 본성까지 숨길 수는 없어 좀 미안해 보인다. 한국의 거리에서 만나는 서양 사람의 무표정은 본성을 벗어나 잠시 현실로 돌아가는 편안함을 선택한 것이고,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말을 걸면 영업용 표정으로 화들짝 응대하는 젊은이는 아직 본성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인연이라고 한다. 불교에선 옷깃만 스쳐도 오백 겁의 인연이라는 말로 인간관계의 엄중함을 경계하고 있다.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라는 말은 모순이다. '다시는 안 보겠다'라는 악담은 인연을 강제로 취소하겠다는 극단의 저주가 된다.


우리는 모두 취소 불가한 필연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는 게 어색한 건 당연하고 타고난 본성이다. 수행을 통해 감정이 그 본성에 근접하고 충실할수록 세상은 밝아지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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