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어법
포탈 뉴스에서 여자를 검색해 보았더니,
맨 위에 여자만 이 떴다. 여자만汝自灣은 전라남도 여수 근방의 지명이다. 갯벌로 유명하다.
여자 배구, 여자 양궁 대표, 여자 친구가 뒤를 이었다. 스포츠 종목, 친구의 성별을 구별하는 관형어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기간을 1980년대로 설정하고 다시 돌렸더니 좀 '독자적인 여자 '가 더러 눈에 띄었다.
면허시험 합격 부탁 뇌물 준 여자 입건
농성 중인 여자노조원 때린 관리 사원 입건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의 언론이나 공적인 통신에서 여자라는 표현을 여성女性이 대신하고 있다. 여자를 따라서 대립쌍인 남자도 덩달아 남성이 되어버렸다.
3살 아들 때려 숨지게 한 30대 여성 구속 송치.
그 여성분을 만났고 3개월 정도 교제했다.
이어 음식을 다 먹고 남성분이 갑자기 나간 후 여성분도 마스크를 쓰더니 나갈 준비를 했다.
영하 50도 항공기 바퀴 옆에 숨어서... 과테말라 남성 기적의 밀항.
지나가던 여성 선로로 밀치더니… 유유히 사라진 30대 남성.
항문에 금괴 15Kg 중국서 밀반입한 60대 남성 검거.
앉아있는 여성분 앞에 가서 하모니카를 멈추고 얼굴을 가까이 대며 돈을 요구하더라고요.
위에 있는 예문들에서 여성, 남성은 적어도 여자나 남자로 바꿔 써도 무방하든지 또는 바꾸어 써야 맞다. 그리고 뒤에 붙은 분 은 모두 불필요하다. 여자와 여성, 남자와 남성은 비슷한 말이지만 같은 말은 아니다. 때로 섞어 쓸 수는 있어도 의미가 다른 별개의 단어다. 사전은 남자와 여자를 각각 남성,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영어에서도 남자, 여자를 뜻하는 man, woman은 20-30 개 기초 명사에 들어갈 정도로 빈도 수가 높은 어휘다. 성별은 사람을 생물학적으로 식별하는 보편적인 정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민번호 뒤 번호 첫자리를 보면 남녀를 구분할 수 있다.
반면 남성이나 여성은 아래 예문에서와 같이 성性의 측면에서 성별을 강조해서 이르는 말이다. 남자나 여자에 비해 쓰임새가 제한적이다.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고 있다.
힘 있는 남성 합창은 뮤지컬의 분위기에 박진력을 더해 준다.
여성 단체는 낙태 반대 운동을 벌였다.
평범한 어휘인 남자, 여자가 스포츠 종목이나 화장실을 구분하는 용도로만 남았다. 어쩌다가 초급 한국어 능력시험 TOPIK이 정한 1560 개 기본 어휘에도 안 나오는 남성, 여성에게 자리를 내주게 되었을까.
언어가 시대를 반영한다.
여자의 위상 변화가 언어에도 반영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자가 어디서 감히' 하면서 여자를 비하하던 과거 남자 위주 사회의 흔적을 피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반면에 근래에 와서 많이 쓰는 '여성'에선 양성의 정체성을 존중해 주는 듯한 학구적인 냄새가 난다. (격식) 있어 보이는 '여성'의 착시 효과가 '여자'를 밀어냈다고 추측한다.
무생물에도 성별을 부여하는 영어권 언어에 비해 우리말은 성性중립적이다. 남자, 여자는 성별을 나누는 극히 일상적인 표현이며 차별적이지 않다.
예전에 여자들이 부당한 차별을 받았다고 해서 여자라는 어휘 자체를 말살하는 건 우매하다. 메시지가 싫다고 메신저를 공격하고, 축구 중계를 보다 화난다고 텔레비전을 부수는 격이다. 내칠 게 아니라 사회의 인식을 꾸준히 변화시켜서 여자가 주는 낮은 느낌을 격상시키는 게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정권 잡으면 행정부 명칭부터 바꾸고 정권 뺏기면 정당 이름을 갈아치운다. 행정안전부의 전신은 1948년 출범한 내무부와 총무처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행정자치부로 통합 운영해 오다가 이명박 정부 때 행정안전부로, 박근혜 정부 출범 때 안전행정부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이후 세월호 참사로 국민안전처가 새로 생기면서 행정자치부로 간판을 변경했다. 현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행정안전부라는 간판을 두 번째로 달게 됐다. 참 가볍다. 조직의 변화에 부합하려고 그랬겠지만 정작 국민은 장관 청문회 때 한 번 들었을 그 이름들을 기억이나 할까.
온 나라가 꾸미고, 부풀리고, 바꾸고, 거죽에 매달리고 있다. 인구당 성형수술 건수도 세계 1위다. 거죽은 거짓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남자, 여자는 평칭平稱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고 범상하게 부르는 말)이다. 요사이 존칭이 인플레가 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평칭이 좀 무례하게 (쌍스럽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용렬 맞은 인식이 있다. 이에 비해 여성, 남성을 '안전한' 높임말로 오인하고 있는 듯하다. 여성으로도 불안한 지 '분'까지 붙여서 여성분이 대세다.
'분'은 의존 명사로서 '반대하는 분', '다섯 분' 같이 꾸미는 말과 같이 쓴다. '친구분'처럼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 붙어서 접미사 역할도 하지만 제한적이(어야 한)다. '보호자분', '따님분' '청취자분'처럼 막무가내로 가져다 붙이고 있는 높임 어미가 여성, 남성에게도 옮아갔다. 상대가 아닌 객체를 획일적으로 높이는 천박한 풍조를 언론이 선도하고 있다.
언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함께 변천한다. 이러한 변화는 동시대인이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몇 세대를 거친 후에 비로소 인식된다.
'1도 없다'라는 표현은 우리말이 서투른 외국 출신 연예인이 실수로 썼다가 유행어가 되었다고 한다. 어문 규정 상으로는 '하나도'를 '1도'로 바꿔 쓸 수 없다. 농담이 진담 된다고 이런 언어의 변태가 '변천'으로 굳어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많이들 쓰고 있다.
여자--> 여성--> 여성분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언어의 변천으로 보기 어렵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갈래갈래 나누어 써야 마땅한 여자/여성 같은 낱말들을 거꾸로 통폐합시키는 건 일종의 언어 파괴며, 언중言衆을 표현의 색맹으로 만들어 버리는 짓거리다. 안 그래도 외국어의 분별없는 오남용으로 훼손되고 있는 우리말의 퇴보를 재촉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국어의 발전과 국민의 언어생활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한 기관이 있길래,
여자/여성을 혼용하고 있는 경향에 대해 동 기관의 입장을 질의해보았다.
'답변드릴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닙니다. 이곳은 어문 규범, 어법, 표준국어 대사전 내용 등에 대하여 문의하는 곳임을 이용에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회신이 돌아왔다.
''축구 협회 '골때녀'에 감사패…여성 축구 활성화 공로''
급기야 스포츠 종목에도 여자 대신 여성이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