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적인 자리나 언론에서는 과거에 행세하던 사람을 이를 때 이름 뒤에 전직을 붙인다. 얼마 전에 전前 대통령이나 장관 이름에 전직 없이 씨氏만 붙여 불렀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부른 쪽으로서는 존경스럽지 않다는 의사의 표시였고, 불린 쪽도 불유쾌하게 받아들였으니 적어도 쌍방 간에 뜻은 통했다고 볼 수 있다. 전직을 얘기 안 해도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인사들이었으므로 여기에서 '전직'의 역할은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언론에서는 살인범의 이름에도 씨를 붙여준다 (A 씨, 모씨).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증거가 충분할 때에 한해 예외적으로 범죄자의 얼굴 등 신원을 공개하는 데 그제서야 씨를 (과감하게) 뗀다. 고작 이름을 부르는 게 흉악범을 향한 공개적 힐난이 되는 것이다. 개나 소나 가리지 않고 다 붙이는 호칭을 전관에게 쓰니 당사자가 좋아할 리 없다.
위 사례에 나온 호칭을 높임 오름차순으로 늘어놓으면 (그냥) 이름 - -> 씨 - -> 직함의 순서가 된다. 씨는 영어의 Mr. 나 일본어의 상様에 해당하지만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다른 존칭에 밀려 낮춤말(비칭)에 가깝게 변질되었다. 사전에는 어느새 '씨는 윗사람에게 쓰기 어려운 말'이라고 되어있다.
당사자의 이력을 알리거나 나라에 헌신한 업적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전직을 붙여주는 관행은 다른 나라에도 있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또는 미스터 바이든이라고 했다고 해서 비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이름은 다른 사람과 식별하기 위한 말이다. 아이를 나면 제일 처음 하는 게 이름 짓는 일이다. 예전엔 집안의 어른이 심사숙고해서 갓난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공들여 지은 이름의 용도가 참 제한적이다.
친족 간 손아래나 조직에서 부하를 부릴 때 쓰는 이름은 하향 일방적이다. 그마저도 나이가 들면 손아래라도 이름을 안 부르고 아이의 이름 등으로 우회해서 부른다. 조직에서도 상사가 부하를 부를 때 직함을 붙이는 게 보통이다. 스스럼없는 친구끼리도 나이가 들면 이름 부르기를 조심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웬만한 욕설보다 더 무례하고 모욕적이다. 술자리 다툼의 단골 원인으로 반말지거리가 있는데 이름을 부르면 반말보다 사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동양의 사대부들은 이름名 외에도 호號가 있었고 자字를 따로 '운용' 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율곡은 호이고, 이름은 이이李珥다. 숙헌이라는 자가 있었고 율곡 말고도 석담, 우재 등 여러 개의 호가 있었다고 전한다. 사후에 나라에서 문성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렸으니 그 양반 이름자만 해도 대여섯 가지가 되는 것이 정작 이름을 사용할 일은 별로 없었을 듯하다. 이름 부르는 걸 문화적 금기로 여기는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호칭이 양극화하면서 씨 같은 평칭이 낮추어 부르는 비칭卑稱이 되어버리는 평가절하가 도미노식으로 일어난다. 중간이 없다. 씨의 위상은 범죄자나 막노동판에서 동료를 부르는 칭호로 전락했다.
사회에서 마찰을 피하고 싶은 용렬 맞은 대인관도 존칭 과장에 한몫을 한다. 상대방의 환심을 사려는 밑져야 본전 얄팍한 계산에서 당당하게 평칭을 못 쓰고 슬금슬금 접대성 존칭을 날린다. 하지만 그 존칭도 언제 약발이 떨어져 비칭이 될지 모른다. '이런 답답한 양반 봤나'에서 '양반'은 이미 존칭이라고 할 수 없다.
호칭을 대신하는 직함이 조직을 넘어서 사회에서 통용되다 보니 직장 생활에서 진급이 중요한 성취동기가 되기도 한다. 인사철이면 처갓집에서 '김서방 부장 달 때 아직 안되었나' 소리 들을까 봐 초조해지는 사람들도 있다.
듣는 이를 부르는 이인칭 대명사 '너'의 용도가 옹색한 것도 호칭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다. '너'라고 잘못 불렀다간 낭패를 본다. 집안에서는 가족 호칭이 있으므로 손 아래에 한해서 너라고 부르는 호칭 질서가 그리 불편하지 않다. 수평적 호칭의 수요가 많은 사회에서 쓸만한 범용의 이인칭 대명사가 없다. 사회에서 안전하게 상대를 부를 대명사가 없는 것도 직함을 끌어다 부르는 이유 중의 하나다.
군더더기가 덕지덕지 붙으면 말이 비대해진다.
말이 비대해지면 상대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알맹이는 묻히고 소통이 부정확해진다. 경제 원칙은 언어에도 적용된다. 최소한의 언어에 최대한 정보를 담는 것이 현명한 언어의 소비다.
우리가 요새 뉴스에서 자주 듣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와전되었다', '말했다', '들은 적 없다'
따위의 짜증 나는 실랑이의 원인도 비효율적인 언어생활과 무관치 않다.
사회가 발전하고 교류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전통시대의 수직적 질서가 아닌 가치중립적인 호칭이 절실하다.
우리말의 이름, 이인칭의 적용 폭을 전향적으로 넓혀야 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변천하지만,
소중한 우리 문화자산의 진화를 시간에만 의지할 수 없다.
사용자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보살펴야 한다.
결국 말의 질은 사용자의 질에 비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