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전용의 선결 과제
① B 형 간염 검사를 해서 양성으로 나오면 간염 보균자다. 간염을 방치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
② 간암이 의심되어서 검사를 받았더니 양성이라고 한다. 암은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나서 결과가 양성이라는 얘기를 들은 환자는 질병의 종류에 따라 울고 웃는다.
'양성' 판정을 받은 환자의 희비가 갈리는 이유는 뜻이 다른 한자어 의학용어의 우리말 발음과 표기가 같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의학적 소통의 규범이 환자의 정서와 따로 논다.
① 요새 코로나 진단할 때 쓰는 PCR 검사는 의심 환자와 진짜 환자의 RNA를 비교해서 감염 여부를 판단한다. 양쪽이 일정 비율 이상 일치하면 양성陽性으로 반응했다고 하고 확진 판정한다. 얼마 전까지는 증상에 관계없이 즉시 격리 병원으로 데려가고 동선까지 공개했다.
검사에서 기술적으로 '기대하는' 두 검체의 일치가 확인되었으므로 '긍정 POSITIVE'이라는 뜻으로 양성陽性표현을 사용하는 것 같다. 환자에게는 부정적인 결과임에도 매정하게 긍정의 부호로 표시하는 의학용어가, 주요섭이 그의 수필 '미운 간호부'에서 푸념한 '과학적 냉정'을 생각나게 한다.
투베르쿨린 반응은 결핵균을 피부에 주사해서 감염을 판단하는 방식이다. 피부가 부어오르는 양성陽性 반응을 보이면 감염되었다는 얘기다. 다만 반드시 결핵 환자는 아니다.
감염병 진단 검사의 결과는 감염 여부 기준 음양陰陽으로 표시한다. 감염이 맞으면 양陽성이고 아니면 음陰성이다. 환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하는 식이다.
한편,
② 암은 종양의 일종이다. 세포가 무제한으로 증식하여 주위의 조직을 침범하고 다른 장기에 전이하는 악성 惡性 종양이다. 의심되는 종양 조직을 검사해서 암 여부를 판별하기도 하는데 이 때는 결과가 양성良性이면 암이 아니다. 대부분 양성良性 종양은 나중에 암으로 발전할 기미가 없으면 그냥 놔두기도 한다.
종양은 조직의 성질에 따라 양성良性 , 악성惡性으로 구분한다. 종양이 착하면 양良이고 고약하면 악惡 , 즉 암이다.
일본의 한 국회의원이 '양성陽性이라는 건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거군요' 했다가 빈축을 산 적이 있다. 코로나 초기인 2020년 초 일본의 입헌 민주당 에다노 의원이 국회에서 후생성 대신에게 질의하다 생긴 일이다.
위와 같이 한중일 삼국은 동일한 용례로 한자어 양성陽性과 양성良性을 사용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양陽과 양良의 발음을 구별하며, 일본은 한자도 병기한다. 우리나라는 두음법칙을 적용하므로 한글로 표기할 때 두 글자의 구별이 안된다.
영어 포함해서 4개 언어 중에서 우리말을 제외하고는 (감염 사실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어색함은 있지만) 감염병과 종양의 결과가 양성일 때 적어도 발음은 다르다.
위에서 예를 든 일본 에다노 의원의 실수는 양陽과 양良을 혼동한 게 아니고 양陽의 밝고 긍정적인 뜻으로 미루어 양성陽性을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상태로 착각한 듯하다.
우리말에서 양성陽性과 양성良性처럼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면서도 대립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혼란을 주는 용례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피의자 被疑者 : 범죄 혐의자
피해자 被害者 : 범죄로 침해나 위협을 받은 자
범죄사건에서 반대 입장에 있는 양측인데 발음은 매우 비슷하다.
법률 용어, 의학 용어라서 어렵다는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혼란을 방치하고 있다. 법과 의학 공부가 어렵다고 해서 그걸 소비하는 대중까지 난해하고 불편한 용어를 감내할 이유는 없다. 의지만 있으면 피의자를 다른 말로 바꾸면 된다, 꼭 피被자 돌림으로 할 필요도 없고.
지양 止揚 : (더 높은 단계로 오르기 위하여) 어떠한 것을 하지 아니함.
지향 指向 : 작정하거나 지정한 방향으로 나아감.
지양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지향과 구별하기 위해 양揚에 일부러 힘을 주는 수고를 한다.
함정 문제 출제하고 틀리기만 기다리는 식이다.
'지양'에서 '양揚' 은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발음이 혼동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더 나아지기 위해 배척한다'는 뜻의 '지양'을 꼭 써야 할 사례는 많지 않다. 다른 말로 대체하거나 안 쓰면 그만이다.
건강전문 매체 헬스데이는 “날고기를 먹으면 식중독을 일으키는 살모넬라균, 대장균, 리스테리아균, 캄필로박터균 등에 감염될 수 있다”며 “고기나 생선, 달걀은 충분히 익혀먹으라”고 했다. 미 식품안전 전문가들은 이 남성이 병에 걸리지 않은 건 우연일 뿐이며 날고기는 지양하라고 경고한다.
위 기사 예문에서 '지양' 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정도의 뜻이다. 지양의 원래 뜻과는 거리가 있다. '먹지 말자' 같은 부정적 서술을 (용렬 맞게) 피하려다 발음도 '위험'하고 뜻도 들어맞지 않는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았나 의심한다.
제패 制霸 : 경기 따위에서 우승함.
패배 敗北 : 싸움에 져서 도망함
끝없이 헷갈리는 용어
'제패'는 이겼다고, '패배'는 졌다고 하면 된다. 싱거우면 이겼다는 동사에 부사를 쓰던지... '판판이 이기다, 가볍게 이기다, 너끈히 이기다, 대박. 그리고 운동 경기는 전쟁이 아니다, 졌다고 도망가지 않는다.
결제 決濟 : 대금(代金)의 수불(受拂)에 의하여 거래를 청산하다.
결재 決裁 : 상관이 부하가 제출한 안건을 재량(裁量)하여 승인함.
끝없이 틀리는 철자
자주 철자를 혼동하는 한쌍의 어휘다.
'돈을 주다'라는 간단한 말을 완곡하게 돌려서 '결제'라고 쓰면서 사서 고생한다.
한자 문화권에 속한 우리나라에서 한자는 수천 년간 주류 문자로 사용되어 왔다. 우리말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로 되어있는데 우리 발음으로는 같거나 비슷한 한자가 많다. 그래서 예전엔 일상적인 문서에서 한글과 한자를 병기함으로써 혼란을 방지했다.
한글 전용, 즉 한자어 어휘를 한글로만 쓰다 보니 ,
비슷한 발음의 한자어끼리 헷갈리고,
같은 한자에서 파생된 어휘끼리 연결이 안 되고,
더 이상 파생도 못 시키고,
뜻을 유추하지도 못한다.
한글 전용을 통해 자주적 학문과 사상을 위한 실마리를 마련하자는 주장엔 적극 공감한다.
한글 전용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양성과 양성처럼 한글로만 적었을 때 헷갈리는 어휘들을 정리하고 알기 쉬운 말로 바꿔 써야 한다. 지금은 마치 다리가 부실한 사람의 목발을 빼앗고 미는 형국이다. 우리말이 홀로 설 때까지는 한자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다.
글 이전에 말의 문제다.
수많은 한자어 어휘들을 쉬운 말 또는 순우리말로 돌려놓는 작업이 우선인데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실속 없이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한자어가 그대로 버티고 있다. 전문용어일수록 한자어를 고집한다. 거기다 이제는 영어까지 가세해서 우리말을 밀어내고 있다.
모 국립 기관에 혼란스러운 용어 양성陽性 을 대체할 만한 어휘가 있는지 질의했더니,
'의학 전문기관에 물어보라'는 회신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