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無信不立
'사람이 착해 빠져서...' 집안의 어르신들은 아버지 얘기를 이렇게 시작하곤 했다. 그리곤 ' 남우(남의) 말을 너무 믿어서 탈이야 ㅉㅉㅉ'라는 탄식으로 이어졌다.
대 여섯 살 어린애였지만 칭찬이 아니고 핀잔하는 분위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아버지가 직장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에 번번이 실패하던 때다. 동업자 말만 믿고 일을 벌이다 그르치는 아버지가 딱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착한 어린이'와 '착한 어른'에서 '착하다' 형용사는 발음은 같고 뜻이 다른 동음이의어로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사실이나 말이 실현될 것으로 생각하는 심리 상태를 '믿는다'라고 표현한다. 믿음이 굳어지면 신념이 되고, 믿고서 의지하게 되면 신뢰가 된다.
신뢰는 미래의 이익을 위해 감수하는 모험의 성격이 있으므로 누가 강제하거나 요구할 수 없다. 내가 아는 어떤 미국 사람은 툭하면 'Trust me 나를 신뢰해'로 말을 시작한다. '정말'처럼 영어의 관용적인 표현에 가깝다고 이해는 하면서도 자주 들으면 불편하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강매하듯이 조르는 사람 보면 되레 의심이 생긴다.
한국의 사기 범죄 건수가 OECD 회원국 중 1위라고 들었다. 우리 치안이 잘 되어 있어서 폭력배나 도둑놈에 비해 사기꾼이 많아 보이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주위에 사기 사건이 흔한 건 사실이다. 친구 말 믿고 빚보증 서줬다가 낭패 보는 사례가 많다 보니,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낳기도 전에 애가 커서 보증을 설지 보물을 캘지 어떻게 아나... 사업하다 사기당해서 문을 닫는 회사도 드물지 않다.
사기는 남을 속여서 돈이나 물건을 받아 가는 거짓말 범죄로 정의하는데 속임수는 상대방의 신뢰를 배반해서 부당한 이익을 추구하는 짓이다. 보이스 피싱도 금융 사기의 일종이다.
한국의 사회 신뢰도가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2016).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그의 책 '신뢰 Trust: The Social Virtues and The Creation of Prosperity (1996)'에서 한국, 남부 이태리 등을 저 신뢰 국가로 분류했다.
남을 너무 신뢰해서 당하는 사기 범죄가 많다는 나라에서 신뢰도가 낮다니 무슨 소린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은 나누고 쪼개서 단순화하면 윤곽이 드러난다. [分析분석 : 나눌 분分, 쪼갤 석析]
사적, 공적公的 신뢰도로 나누고 내적, 외적 신뢰도로 쪼개 보자.
가족, 지역, 학벌의 연줄로 얽힌 연결망으로 가르는 내적, 외적 신뢰도의 격차는 상식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끼리끼리 뭉치는 배타적 연고주의는 우리 사회의 신뢰도 측정에 특이한 변수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평균 신뢰도를 깎아 먹는 으뜸 요인은 낮은 공적公的신뢰도다.
신문의 1면을 펴 들고 욕을 하는 할아버지, 삼촌들을 보며 자란 내가 여전히 욕을 하고 있다. 달라진 건 욕을 먹는 공적 대상이 정부나 국회에서 사법, 언론, 교육 심지어는 종교계까지 전방위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힘 있는 자들이 원칙을 무시할 때 공적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진다.
원칙은 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생기는 갈등을 규범으로 조정하고 해결한다. 각각의 구성원이 규범을 존중할 때 사회의 신뢰도가 올라간다. 그렇지 않고 규범을 깔보고 조롱하는 무리가 별 탈 없이 지내면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는 떨어진다. 그 무리가 권력 상위 계층이면 (대개 그렇다.) 공적 신뢰는 따따블의 속도로 추락한다.
'신뢰의 법칙'을 쓴 사회 심리학자 데이비드 데 스테노David DeSteno는 권력자가 규범을 일탈하는 경향을 생물학적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권력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 즉 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아쉬운 게 없으므로 규범을 지켜서 장기적인 공익을 기대하는 대신, 규범을 어기고 단기적인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 '신뢰의 법칙' 요약
국민은 권력자들이 규범을 칼같이 지킬 것을 기대하는 반면 권력자(의 일부)는, 규범은 힘없는 민초들 간에 서로 협동하는 장치라는 상반된 생각을 한다. 권력자(의 일부)는 규범에서 열외하는 특권을 권력의 일부 또는 그들의 위상에 대한 국가의 보상 정도로 착각하기도 한다. 인간은(침팬지도) 차별을 받으면 분석하기도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국민은 강자 중심의 불공정에 분노하면서도, 은연중에 '법대로...'를 무능한 이들의 생존 방식으로 간주하게 되고 사회의 법질서는 문란해진다.
사회는 협동을 통해 유지되며 협동은 구성원 상호 간의 신뢰에 기반한다. 남이 내일 규범을 지킬 거라고 믿고, 나는 오늘 규범을 지키는 수고를 한다. 신뢰는 장기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단기적인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구성원이 신뢰를 어기지 않을 때 협동이 작동하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신뢰는 선순환한다. 화폐에 대한 믿음처럼 국가 제도와 질서에 대한 공적 신뢰가 쌓인다.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협동하게 하는 규범이나 네트워크를 사회적 자본이라고 한다. 위에서 인용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한 나라가 경제 선진국이 되기 위해선 법과 제도, 인적·물적 자본으로만 부족하며 사회적 자본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는 부자 나라가 부족한 게 바로 사회적 자본이라는 거다.
사회적 자본이 잘 확충된 나라일수록 국민 간의 신뢰가 높고 거래 비용이 적어 효율성이 높다. 교통 문화가 성숙한 공동체에서는 거리에 신호등을 없애도 사고는 늘지 않고 오히려 교통 흐름이 빨라지는 현상과 같다.
사회적 자본의 으뜸 요소는 신뢰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에서는 해마다 나라 별로 안전보장, 거버넌스, 주거환경, 기업환경 등에 점수를 매기고 종합해서 번영지수를 발표하는데 사회적 자본(위 표에서 사람 모양 상징)이 평가 항목에 포함된다. 한국의 2021년 종합 번영지수는 160여 나라 중 29 위로 상위권에 속하지만 유난히 사회적 자본은 꼴찌에 가깝다. 매년 그렇다. 교육이 싱가포르에 이어 2등, 건강이 3등인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한국은 낮은 공적 신뢰도가 문제다.
공자의 수제자 중에 자공子貢은 이재에도 밝고 정치적인 수완도 좋아 재상을 몇 차례나 했다. 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캐물었다. 자공은 뭐든지 등수 매기는 걸 좋아했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백성의 신뢰가 경제, 국방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대를 확충하는 것, 백성이 그를 믿도록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대를 버려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버려야 한다. 예로부터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믿어 주지 않으면 정치가 바로 서지 않는다 "
논어 안 연 편 7 / 낭송 논어 (북드라망)
子貢問政 子曰 足食足兵 民信之矣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何先
曰
去兵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何先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