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高興에서 만난 사람들
거금도 동쪽 끄트머리 마을의 민박 집에 짐을 풀고 나서 근처에 좀 걸을 데 없냐고 물으니 주인이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생태숲'에 가보라고 한다.
거금도는 고흥 서남부에 있는 큰 섬인데 이름은 클 거巨가 아니라 살 거居, 거금도居金島다. 섬 안에 커다란 금맥이 뻗어 있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으로는 고흥군 금산면, 쇠 금金인가 했더니 비단 금錦, 금산면錦山면이다.
'여수에서 돈 자랑,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는 들어 봤으나 '고흥에서 힘 자랑 말라'는 얘기는 여기 와서 처음 들었다. 국민학교 때 우리를 흥분시켰던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고향이 거금도라서 그런 걸까? 김일 선수는 세상을 떴지만 고흥 힘자랑 경고는 아직 유효하다. 고흥 출신의 유력 정치인이 적지 않다.
거금도는 도양읍에서 남쪽 4 킬로 미터 정도 떨어진 섬인데 2011년에 거금대교가 개통되면서 소록도를 거쳐 고흥반도와 육로로 연결되었다. 섬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과 어업을 겸하고 있으며 김·미역·매생이 양식업이 활발하다. 다리를 놓기 전엔 도양의 녹동항까지 배가 뻔질나게 다니고, 배 시간에 맞추어 버스도 자주 왕래했다며 그때가 오히려 나다니기 편했다는 노인들이 있다.
민박집에서 점심을 하고 나서 생태 숲에 도착하니 오후 두 시 정도 됐는데 숲길이 컴컴하다. 이팝나무, 비자나무 같은 난대 식물이 울창하게 군락을 이루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사이로 2 킬로 가량의 데크 길을 뚫어 놓았다. 그래서 '캐노피 하이웨이'인가? '캐노피'는 어렵고 '하이웨이'는 생뚱맞다.
아마존 같은 열대 우림에서는 60% 이상의 동식물이 나뭇가지와 잎으로 하늘을 가린 숲 덮개 (forest canopy)에서 서식한다고 한다. 숲 바닥에 비해 기온이 높고 습도가 낮은 숲 덮개는 시야가 좁아서 거기 사는 원숭이나 새 같은 동물들은 소리를 통한 통신 방법이 발달했다고 한다.
거금 생태 숲길 중간쯤에 적대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산행 거리 3.6 킬로. 적대봉의 사방 바다 조망이 뛰어나다고 들었지만 오후에 혼자 산으로 들어가는 게 엄두가 안 나서 숲 길만 산책하고 입구로 돌아 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사십 대 남자 한 명이 올라온다. 오늘 생태숲에 와서 처음 보는 사람이다.
말을 건네니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서 무얼 꺼내 머리에 붙이더니 다시 말하란다. 청력이 약해져서 잘 안 들린다고.
내가 다시 물었다.
"지금 적대봉 올라가는 길이냐고요."
그는 숲길을 몇 바퀴 정도 걷고 갈 거라면서 나보고 적대봉에서 내려왔냐고 한다.
"늦어서 숲 길만 걷다 돌아가는 길예요"
"적대봉에 가보고 싶으세요? 제가 같이 가 드릴 수 있어요."
뜻밖의 진지한 제안으로 '반격'하는 상대의 인상이 범상치 않다. 남을 돕는 책임량을 오늘 못 채웠는데 건수 잡았다는 모양새다. 나는 그가 늦은 시간에 입산하는 게 걱정스러워서 참견한 건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좀 뺐다.
"아유, 오늘은 힘들어서 못 올라가요. "
그 사람은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여기 말고 적대봉에 오르는 최단 코스가 있거든요. 제 차를 따라오세요."
생태 숲 입구에 있는 숲 홍보관에 들어가서 물병을 채우더니 나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유턴한다. 30분이면 적대봉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줄레줄레 따라갔다.
우리는 (생태숲이 있는) 청석 마을에서 섬 중앙에 있는 파성재로 이동해서 주차한 후에 산길로 들어섰다. 이정표엔 적대봉까지 2.5 킬로. 반은 거저먹고 산 중턱에서 시작하는 '속성반'이다.
"땀이 나면 불편해서요." 하면서 그는 머리에 붙였던 인공 와우를 떼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휘적휘적 앞서 걷는다. 이제부터 말 붙이지 말라는 신호다.
세상에 거저먹는 산이 어디 있나. 된 비얄을 헉헉대며 기어 올라가니 그 사람이 저만치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30분'이 누구 기준이지 물었어야 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평탄한 능선길이 나온다고 위로한다. 산에서 '조금만 더'는 덕담이지 정보가 아니다.
나보고 신학 대학 교수 같다며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나는 직감했다, 이 양반 성직자나 수도자다. 피정 ( =카톨릭 판 템플 스테이 ) 가면 나보고 어느 수도원 소속이냐고 물어보는 이들이 가끔 있다. 자랑질 아니다. 조금 더 들어보세요.
그런가 하면, 밥 먹으러 들어갔는데 식당 주인이 빤히 쳐다보면서 어디서 왔냐 (=무얼 팔러 왔냐)고 한 적도 있다. 혼자서 두리번거린다고 모두 외판원으로 보지는 않는다. 성당에 미사 보러 들어가는데 나보고 지금 무슨 공사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신자도 있었다. 흙 묻은 등산화를 신었다고 모두 작업자로 보지는 않는다. 내 인상이 혼란스러운가 보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고 링컨이 그랬다는데, 나는 이 나이까지 타인의 '삘'을 교란시키고 있으니 어린 건지 덜된 건지 한심하다. 그런데도 성찰은커녕 남 탓이나 하면서 '부처 눈에 부처가 보인다.'는 가짜 뉴스로 오만하게 버티고 있다.
나는 그리 고상하지 않은 일을 하다 퇴직했다고 실토하며 당신은 무슨 일 하냐고 되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섬에서 십여 년째 사역하고 있는 목사님이었다.
아까 생태 숲에서부터 가졌던 의문들이 한 번에 풀렸다. 잘 들리지도 않는데 지나는 노인의 싱거운 질문에 대거리해 주고, 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세 시간씩 동행해 주고... 목사라서 그랬는지, 그래서 목사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목사님은 신학대학 졸업 후 도시의 교회에서 시무하다 과로로 인해 청력이 약해진 후 농어촌 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농어촌'은 행복하다.
개인사의 수레바퀴도 되풀이 하나보다. 반세기 전 여름이 생각났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때 친구와 같이 무주에 갔는데 구천동 계곡길을 설렁설렁 걷다 보니 백련사까지 올라갔다. 절에서 자고 내려가나 하는데 이십 대 중반 남자가 앞에 나타났다. 여기서 조금만(그때도 2.5 킬로) 가면 덕유산 향적봉인데 같이 올라가지 않겠냐고 해서 따라갔다. 백련사부터는 직벽 오르막이라는 사전 정보 없이 시작한 가벼운 산보는 즉시 지옥 훈련으로 전환되었다. 덕유산 정상에서 내려와서 그날 밤은 교회 사택에서 묵었다. 그 형이 교회 목사님의 아들이었다.
'마당목재'라는 지점에 올라서니 고래 등같이 부드러운 능선길이 시작된다. 다도해의 장관을 내려다보며 정상까지 1 킬로 느긋하게 걸을 만한 길이지만 오늘은 산안개가 자욱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적대봉積臺峰엔 적대적으로 커다란 정상석, 그리고 그 뒤에 봉화대가 구름 속에 신비하게 서 있는데 앞서 간 목사님이 안 보인다.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계시가 들려올 분위기다.
적대봉은 장흥 천관산과 마주 보고 있는데 날씨가 좋은 날은 제주도가 보일 정도로 전망이 좋다고 한다.
이런 지형 때문에 조선시대 봉화대를 설치했으며 남한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된 봉화대라고 내력비에 기록되어 있다.
귀인의 도움을 받아 지나칠 뻔한 명산을 답사했다. 내려오며 시계를 보니 왕복 두 시간이 넘어 걸렸다.
거금도에 있는 20개 교회가 교파를 초월해서 거금도 기독교 연합회라는 이름의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는데 그 설립 배경이 특이하다.
교인 장례를 치를 때 교회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 어려움을 겪다가 목사님들이 모여 함께 관을 운구하기 시작하면서 연합회 모임이 생겼다고 한다.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장례 봉사를 중단했지만, 한 번에 7-8 명의 목사님들이 운구에 '동원' 된다고 한다.
죽어서 목사님들이 받드는 영광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고흥 거금도에서 생을 마감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나는 고흥에서 사흘 연속으로 귀인을 만나고 있다.
능가사에서, 연홍도에서,
그리고 오늘은 거금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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