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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l 11. 2022

[고흥] 나는 그날 능가사에서 종을 몇 번 쳤나?

고흥高興에서 만난 사람들

# 제보에 의해 글 중 '국보'를 '보물'로 정정하고 재 발행합니다. 

능가사의 템플 스테이 1박 프로그램은 사찰 안내로 시작했다. 오후 세시에 '입산'해서 다음날 점심 공양 후에 '하산' 하는 휴식형이지만 마냥 쉬게 놔두지는 않는다. 지대가 별로 높지 않은 절인데도 출입을 입산과 하산으로 부르는 전통이 재미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신라시대 절 보현사를 인조 때 중창하면서 이름을 지금의 능가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전남 고흥 반도의 동쪽, 팔영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많은 고찰이 안타깝게도 임진왜란과 육이오 때 소실되었는데 다행히 육이오는 능가사를 피해 갔다. 조계종 지역 본사本寺인 순천 송광사의 말사末寺가 된다.


일주문이 없는 능가사의 초입은 사천왕문이다. 어려서 동네 근처에 큰 절이 있어 자주 가서 놀면서도 마동석 같은 근육질의 천왕 형들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사천왕도 이제는 시대에 맞게 친화적 이미지를 연출해서 아이들의 불교 진입 장벽을 좀 낮춰야 하지 않을까 하는 싱거운 상상을 하고 있는데 지도 법사 스님이 묻는다.


"왼쪽 두 번째 천왕 (서방 담당 광목천왕)이 들고 있는 지물持物 보이지요?"


" 네, 한 손에 용, 다른 한 손에 여의주 아닌가요? "


"아니 어떻게 알았지요? "


용을 미꾸라지처럼 쥐고 있는 천왕의 사진은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용과 여의주를 분리시킴으로써 극단적인 완성의 상황을 피했다는 게 스님의 해석이다. 물극필반 物極必反, 달도 차면 기우나니, 욕심내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라는 교훈이다.


능가사 천왕문의 광목천왕


능가사에는 보물이 두 점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동종이다. 숙종 24년에 장인 김애립이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종각과 함께 녹아버린 범종을 중창한 게 아닌가 짐작한다.


능가사 종루에는 두 대의 범종 그리고 목어와 운판이 있다. 가죽으로 된 북(법고)은 안 보인다.

범종은 지옥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운판은 날아다니는 새, 목어는 물고기가 듣고 해탈하라고 친다고 한다.


"저녁때 범종을 몇 번 치는지 알아요?"

타종 체험을 지도하면서 스님이 문제를 낸다. 


오늘 입산한 사람이 나 혼자라 일대일 개인 교습이다. 스님이 세 분 밖에 없어 웬만한 교육은 모아서 하든지 생략할 만도 한데, 능가사에선 뭐든지 원칙대로 엄격하게 하는 걸 공양간 등에서도 목격했다.


"서른세 번 아니던가요? "


"아니 어떻게 알았지요?"

스님이 칭찬하며 타종 시범을 세 번 보여주고 친절하게도 횟수 세는 요량까지 전수해준다. 나머지 서른 번을 내가 마저 치고 나면 저녁 예불이 시작된다. 실제 상황이다. 


아침 저녁 예불 때는 보물 동종이 아닌 큰 범종을 친다. 당목(종 치는 막대, 아니 기둥) 또한 거대하다. 몇 번을 왕복시킨(=가라 스윙) 다음에 종을 때리는 데 의외로 소리가 웅장해서 심신이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열 번인가 쳤을 즈음 횟수를 한 번 건너뛴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인간은 제대로 하는 게 무얼까.


타종의 청취자인 지옥 중생들이 하루 종일 똥통 속에 잠수하고 있다가 종 치는 동안에만 겨우 올라와 숨을 쉴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종을 치다 마는 행각은 이 경우 방송 사고 이상의 끔찍한 재앙이 된다. 그들에게는 정규직도 아닌 종지기 알바의 인생 종 치는 건 일도 아니다. 


스님은 종루 밑에 내려가서 보이지 않는다. 저 양반도 속으로 카운트하고 있을 거야.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잠정구 provisional ball' 하나 정도를 더 쳐 놓자는 계략이 떠올랐다. 덜 치느니 더 치는 쪽이 아무래도 형량 감경에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그 후 보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별 탈이 없는 걸 보면 온전하게 타종했든지 아니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손을 쓰신 거다.


종각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대부분의 절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대웅大雄 - 큰 영웅은 석가모니의 별칭이고, 자기 자신을 정복한 영웅이라는 의미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능가사 대웅전은 18세기 중엽에 중수한 보물이다. 다른 절과 달리 불당의 뒤편 공간이 널찍하고 시원하다.


불단을 바라보고 중앙에 본존불, 오른쪽 끝에 아미타불, 왼쪽 끝에 약사불을 배치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관세음과 대세지 두 구의 보살상이 서있다.


부처님 양손의 모양을 수인手印이라고 한다는데 능가사의 석가모니 수인은 마군魔軍(수행을 방해하는 악마의 군사)을 물리치고 땅의 신이 증명했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다. 우리가 하늘에 하는 맹세를 인도에서는 땅에 한다고.


지도 법사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를 관할하는데 무한한 수명을 보장해 주므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나무(아멘처럼 기원하는 말) 아미타불'은 극락왕생을 비는 염불.


아미타불과 대칭으로 반대편에 모신 약사藥師불은 질병과 괴로움을 치료하는 부처로서 방향은 동쪽을 관할한다. 요즘처럼 수명보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시대엔 오히려 약사불이 더 인기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웅전 / 대웅전의 뒷면


저녁 예불 시간에 목탁 소리에 맞추어 오체투지 절하는 법을 배웠다.


스님이 목탁을 가리키며,

"뭐 닮았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손으로 물고기 헤엄치는 흉내를 낸다.


"물고기요"


"아니 어떻게 알았지요? "


"네에?..."

'고래도 춤추게 하는' 스님의 눈높이 교수 방식에 넘어가서 내가 한나절 으쓱했었네.




살아있는 동안 악업業을 쌓으면 다음 생에서 축생 같은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선업을 쌓으면 존귀한 신분으로 거듭난다는 권선징악적인 불교 교리가 윤회설이다.


"설령 다음 생이 존재한다고 치더라도요, 서로 기억하지도 못하고 연락도 안 되는 판에 지금의 내가 다음 생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저녁 공양 후, 차담 시간에 내가 먼저 윤회설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 차담도 송구스럽게 지도 법사 스님과 독대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지요."


속으로 '산은 산이고 물은...'같은 선문답은 별로입네다...하는데, 스님이 이어서 윤회론을 잘게 썰어 내놓는다.

"한강에 물이 흘러가는데 조금 전의 물과 지금의 물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


절이나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은 인간적인 욕망과 평생 담을 쌓고 사는 수도자들을 존경하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럽게 바라보기도 한다.


"고행과 수행은 한 끗 차이지만 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행에 방해가 될 수도 있어요." 수행이 어려울지언정 지속적으로 괴로워해서는 곤란하다는 게 스님의 수행자관觀이다. 번뇌도 잠시 일어나야지 지나치면 뛰쳐나가든가 미치든가 둘 중의 하나라는 얘기다. 궁극적으로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수행자로서 육체적인 고통만으로 뭔가 이루었다고 자족하는 건 어리석은 착시 효과라는 맥락이다.


"나가고 싶은 맘이 없으면 거긴 더 이상 감옥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늘 깨어 있으되, 늘 괴로워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으며 가끔 가는 어느 봉쇄 수녀원의 부속 성당을 생각했다.


작은 성당의 수녀원 쪽 절반은 창살(실제 창살이다)과 커튼으로 막아 놓았는데 수녀님들은 그 안에서 미사를 드린다. 그들은 수녀원에서 (내 눈엔, 갇혀서) 평생 살면서 아프거나 죽어야지 나온다. 하지만 미사 시간에 간간이 창살 사이로 넘어오는 그들의 웃음소리는 천상에서 들리는 양 천진하고 난만하다. 어느 편이 갇혀 있는 건지 창살의 안팎이 헷갈린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


정상 회담도 아닌데 예정 시간을 훨씬 넘겨 차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 깜깜하다.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리네 / 당나라 시인 가도


템플스테이 게스트는 달도 없는 밤에 아이폰 후래쉬 비추며 숙소 문을 밀까 하다가 당기네 / 브런치 작가 영감


전화 자명종을 네시 반에 맞춰 놓고 불을 끈다. 새벽 예불이 다섯 시다.




템플 스테이의 카톨릭 버전이 피정인데, 템플 스테이가 피정보다 역사는 짧아도 한층 더 개방적이다. 불도보다 타 종교 신자가 더 많이 참가한다고 한다. 불교를 이해시키고 나아가서 포교하는 데 있어 시대에 맞는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불교가 조선 초기 성리학적 가치관에 충실한 억불 정책에 밀려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위상은 상실했지만, 궁중과 민간에서는 전통 신앙으로 꾸준히 계승되고 발전해 왔다. 미물의 존재마저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불교가 양극화, 다극화, 계층화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종을 울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산했다.


자리이타自利利他 수행으로 지나는 나그네의 실눈을 뜨게 해 준 능가사의 지도 법사 스님은 내가 고흥에서 만난 귀인이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에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


지금이라도 머리 깎고 출가해?

자네는 나이부터 탈락일세.


https://blog.naver.com/tourgoh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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