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한국의 청렴도

by 영감

예전에 유럽에서 근무할 때 사무실의 현지인 관리 직원은 걸핏하면 관공서에 전화를 걸어 무얼 물어봤다. 자기 소속과 이름을 얘기하고도 날씨 가지고 한참 너스레를 떨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회사의 법인세 문제부터 나의 거주 허가 연장까지 물어보고 따지고 했다. 우리로 말하면 국세청과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마구 전화질을 해대는 식인데 옆에서 듣는 나는 '저래도 되나' 하며 괜히 불안했다.


유럽 역내 출장 다닐 때는 기차도 더러 이용했다. 미리 기차표를 사서 다니지만 중간에 일정이 바뀌거나 좌석표를 예매 (승차권과 별도로 좌석을 따로 예약) 하려면 역의 창구로 가서 처리했다. 서유럽 기차역의 창구는 앞에 가리는 창이 없어서 그런지 얘기가 길어질 때가 있다. 본건이 다 끝난 후에도 잡담을 5분 정도 더 즐긴 다음에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특히 심했는데, 내가 잰 최장 기록이 25 분. 창구 직원은 승객 얘기 다 받아주고, 뒤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도 뭐라 하는 사람 없었다. (그 뒤로 나는 할머니들 뒤에는 줄을 안 서기로 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기차역 창구 밑에 좁게 뚫린 반원형 구멍에 대고 고개를 앞으로 옆으로 꺾어가며 힘겹게 대화했다. 무뚝뚝한 역무원과의 수다는커녕 뒷사람이 신경 쓰여서 용건이나 제대로 마치면 다행이었다. 창구 안에서 내려다보는 공무원이 어려웠고, 뒤에서 동동거리고 서있는 사람들 때문에 조급증이 생겼다. 역무원은 철도청 소속이었고 충분히 공무원이었다. ( 철도청은 해체되었고 한국철도공사가 이어받았다.)


그때도 폴란드 같은 동유럽 나라 기차역에 가면 교도소 면회실 비슷한 창구의 분위기가 우리와 가까웠다. 다른 점은, 물어보는 사람이 손에 펜과 수첩을 들고 들고 있다는 것. 내 눈에는 수첩을 들고 있는 폴란드 사람의 손이 가늘게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들이 메모하는 습관 때문에 그랬는지, 공적 기관에서 내려주는 정보를 멀거니 듣는 게 송구스러워서 그랬는지 나는 모른다. 어쨌든 동유럽권이 1989년 이후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개방되기 시작했지만 수십 년간 지속돼 온 공기관의 권위는 잔존하고 있었다.


90년대 우리나라 공무원의 위세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궁금한 건 많았지만 민초가 감히 관청에 전화를 거는 행위 자체가 '불경'스러울뿐더러 전화번호도 몰랐다. 당연히 관공서에 찾아가서 공손하게 물어봤고 몇 군데 부서를 똥개 훈련하듯이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점심시간이 되고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고지식하게 찾아가 물어보느니 연줄을 동원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 알아봐야 그나마 쓸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인터넷도 없고 신분에 따라 정보 격차가 심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민원인을 대하는 공무원의 태도가 웬만한 서비스 업체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중앙 부처나 지자체가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어 전화로 물어보면 친절하게 응대해 주거나 관련 부서로 전화를 돌려준다. 그리고 기관의 홈페이지에 부서별 공무원들의 담당업무와 전화번호까지 공개되어 있다. 과거에 비해 민원인들이 편리해진 만큼 민원인을 상대하는 일선 공무원들의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는 그만큼 가중되었을 것 같다.


요즘은 공무원들 상대로 친절교육을 실시하는 게 일상화되었고 동시에 대민 업무가 많은 공무원의 심적 고통을 덜어주는 노력도 병행한다. 상습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악성 민원인까지 있어서, 콜센터에 전화하면 직원에게 폭언이나 욕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몇십 초 정도 들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80- 90년대 이전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과 그 흐름에 따르는 정부 기관의 행정 쇄신으로 국민 편의 위주의 서비스 행정이 가속화되고 있다. 공무원의 처우가 개선되고 행정 전산화로 업무 부담이 경감되니 자연히 민원인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졌다. 더욱이 요새는 본인이 동의만 하면 정부 기관끼리 개인 정보를 조회할 수 있어서 각종 민원서류의 발급 수요까지 줄어들었다.


대민 서비스의 질이 대폭 개선되었는데 일선 공무원들이 취급하는 주민등록등본 발급 같은 단순 민원이 그렇다는 얘기고,



국민 생활이나 기업 활동에 중요한 공장 설립허가, 건축 허가나 형질 변경 등 복합 민원 분야에서는 아직도 민원인이 불편과 부담을 느끼고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국가가 공공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의 일부 활동에 간여하는 건 불가피하다. 이때 주민이나 기업은 국가가 제약하는 활동에 대한 인·허가를 받기 위해 관청을 방문하고 서류를 제출하는 법률행위를 하게 되는데 복수의 관청이 관련되면 복합 민원이 된다. 내용이 복잡하므로 중복 방문이나 중복 서류 준비 등으로 시간이 지체되거나 신청이 반려되면 민원인이나 단체는 좌절한다.


이때 일부 민원인은 관료에게 뇌물을 제공하거나 편익의 공유를 제안해서 부정한 방식으로 민원 목적을 실현한다. 민원의 규모가 크면 부패의 고리는 고위 공직자에게까지 연결되어 행정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국민을 분노하게 한다.



국제 투명성 기구가 발표한 2021년 부패 인식도 조사에서 한국은 OECD 38 개국 중 22위로 하위권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해서 낮은 수준이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 지도층과 공공기관의 부패가 국가 청렴도 상승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람들은 전년도에 비해 한 계단 올라갔다고 대견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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