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여행기
연산군 7년이 되는 1501 년, 조선에 걸출한 남녀 세 명이 태어난다.
퇴계 이황, 문정왕후 그리고 남명 조식이다.
퇴계와 남명은 기질은 다르지만 당대 사림의 학풍을 주도한 조선을 대표하는 지성인이고,
명종의 친어머니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으로 절대 권력을 휘두른 조선의 대표적인 여장부다.
동갑내기 세 사람은 서로 만난 적이 없(을 것 같)지만,
남명은 서신을 통해 퇴계와 학문을 논했고, 상소문(사직소)으로 문정왕후를 비판했다.
산청군 덕산의 덕천강변에 있는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을 찾아갔다. 남명 조식이 환갑이 지나 들어와서 세상을 뜰 때까지 후학을 양성한 덕산에는 남명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선비문화연구원은 남명학을 비롯해 선현들의 실천 유학을 연구하고 계승하기 위해 만든 교육 시설이다.
마침 어떤 단체가 연수를 시작하는지 건물 로비에서 참가자 명단을 체크하고 있다. 첫 시간 강의 제목에 '남명' 이 보여서 나도 좀 들으면 안 되냐고 하니 복도 끝의 사무실에 가보란다. 고맙게도 연구원 직원이 그러라면서 우르르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수강생들을 따라가라고 한다. 강사의 입장에서는 수강생의 동질감을 깨는 청강생은 밥상에 젓가락 하나 얹는 것 이상의 부담이 된다. 이런 사람 맨 앞에 앉아서 뜨악한 질문까지 해댄다.
남명 유적지 일대의 도로는 '남명로' 아니면 '남명길'이고 다리는 '남명교'다. 남명 특강은 연구원 뒤 남명로를 건너 산 중턱의 남명 조식 묘소로 이동한 후에 시작되었다. 남명이 직접 골랐다는 묏자리는 선녀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길지라는 뜻의 금환락지金環落地(라고 주장하는) 덕산 마을을 포근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남명 묘비 앞면 가운데엔 징사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문정공남명조지묘 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는 긴 관명을 조선시대 직함을 쓰는 원칙에 따라 ( 지금으로 치면 공무원의 계급, 부처, 관직) 순서대로 빽빽하게 새겨놓았다. 거기다 시호 ( 문정공文貞公)까지 집어넣으면서 정작 남명의 이름인 식植은 생략됐다. 고인의 행적을 기념하는 데 살아생전의 벼슬이 이름보다 더 중요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름 대신 전·현직 직급을 불러줘야 예우가 된다. 이름 잘 못 부르면 욕이 되고.
남명의 생애는 거창한 관명이 아니고 맨 앞의 두 자 '징사徵士'가 잘 상징하고 있다. 벼슬을 시키려고 했으나 고사한 사람을 징사라고 했다, '부를 징徵, 선비士'. 남명은 명종과 선조로부터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묘비명에 있는 영의정도 사후 증직 받은 벼슬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을 세우고 죽은 이의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주는 추서에 해당한다. 흔히들 하는 말로 영의정이 나온 가문보다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이 더 명예롭다고 하는데, 대제학보다 한 수 위가 벼슬을 고사한 징사라고 한다. 그런데 징사보다 더 쳐주는 선비가 바로 초야에 묻혀 사는 처사處士라는 말이 있다.
남명은 '내 이름 앞에 어떤 벼슬도 쓰지 말라. 오직 처사로 쓰는 것이 옳다. 만약 벼슬을 쓴다면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처사로 남고 싶었다. 그러나 후손 (또는 후학)은 모처럼 조정에서 추증해 준 관직 (영의정, 대제학)의 허명을 좇아서 비석을 새로 파면서까지 남명이 평생 추구한 가치를 훼손했다. 남명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기회만 주어지면) 사대부로서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상식이고 도리였다.
사회에서 필요한 질서를 비판하고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노장老莊 사상과 달리,
유교는 국가 운영의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자질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위한 개인의 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이를 순서대로 잘 요약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리학자인 남명은 왜 열 번씩이나 관직을 거부했을까? 당시는 청문회 나가서 망신당할 일도 없었는데.
조선시대 현자들은 자신의 출처出處에 대해 고뇌하였다. 출은 관직에 나가는 것이고 처는 반대로 물러남을 뜻한다.
논어에도 출처에 관한 대목이 비슷한 내용으로 여러 장章에 걸쳐 나오는데,
예를 들면 위령공 편 6장의 방유도즉사邦有道則仕 하고 방무도즉가권이회지邦無道則可卷而懷之이다.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뜻을 거두어 숨으라는 가르침이다.
화이트칼라의 일자리가 관직밖에 없었던 시대였지만 행동하는 지성 남명 조식은 도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결코 권력의 장식품은 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절의가 있었다.
조식은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창문 좌우의 벽에 크게 써 붙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우리 집에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영원한 과거부터 변함없이 환하게 빛난다. '
남명에게, 경敬은 내면적인 수양의 방법이고 의義는 그 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의 원칙이었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이 의義다.
남명이 차고 있던 칼에 새긴 글
1555년 명종이 남명을 단성 현감에 제수하자 남명은 직을 고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한술 더 떠서 과거 급제도 안 한 자신의 능력을 높이 사서 특채해 준 임금과 조정을 상소문에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명종의 친어머니 문정왕후를 ‘구중궁궐 속의 일개 과부’에 불과하다고 모욕하고, 명종을 대물림한 임금일 뿐 역량은 기대할 것이 없다는 뜻에서 선왕지일고사先王之一孤嗣라고 폄훼했다. 남명의 상소문을 읽은 임금은 '노여워서 안색이 온화하지 않았고 음성도 고르지 않았다(=울그락 불그락 떨리는 음성)'라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명종은 신하들의 만류로 일사逸士( 세상을 등지고 사는 선비)이므로 죄를 다스리지 않겠다며 마지못해 덮고 지나갔다.
남명이 목숨 내놓고 왕가를 통렬히 비판한 상소문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남명의 강직한 선비정신을 배우려는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단성소 또는 을묘사직소라고 불리는 상소문을 새긴 비석이 덕산의 남명 기념관 앞마당에 서있다.
모든 벼슬을 거절한 남명은 61세에 산청 지역으로 이주해 제자 교육에 전념했다.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곳에 학당을 짓고 산천재山天齋라고 이름 붙였다. 산천山天은 주역 산천대축山天大畜 괘의 괘상이다. 산(山)에 하늘(天)을 가두었으니 크게 (大) 모은다(畜)는 개념이다. 송나라 때 학자 정이천은 산천대축 괘를 '쌓인 바가 이미 크면 마땅히 세상에 베풀어서 천하의 어려움과 험함을 구제하여야 하니 이것이 대축大畜의 쓰임이다.'라고 풀었다. 인재를 크게 비축하겠다는 남명의 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산천재에서 조식에게 수학한 사람들 중 정인홍 곽재우를 포함해 50여 제자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이름 붙인 대로 이루어졌다.
남명은 72세까지 장수했다. 1572년 남명이 죽자 선조는 제문을 내려 애도했다고 한다. 국왕 스스로가 제자의 예를 표하였기 때문에 왕의 제문으로는 파격적이다. 이후에도 광해군, 정조가 남명 영전에 제문을 내렸다. 사후에 세 임금이 제문을 내린 경우는 남명이 유일하다고 한다.
남명 기념관 건너편에 선조대왕 사제문 국역 비가 서있다.
'지금이 조선시대냐?' 하는 탄식은 고루하고 후진적인 사례를 풍자할 때 쓰는 비유다.
조선의 선비들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상소를 올려 충정을 표출하였다. 선비 정신의 지조와 절개 그리고 의리의 서슬 퍼런 상소는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했다. 남명 조식은 강직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능력과 인품이 뛰어나니 같이 일 좀 하자는 대통령을 되레 공개적으로 그리고 모욕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이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가? 또한 모욕적인 비판에 심기가 불편해진 대통령에게 그런 직설적 민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감히 직언할 수 있는 측근이 있을까.
남명 조식의 을묘사직소와 그에 대한 당시 조정의 대응을 보면서 나는 조선시대의 선진적인 언론 시스템이 부러워졌다. '조선시대' 함부로 조롱하면 안 될 일이다.
참고한 책
조선의 유학자 조식 / 허권수
남명 선생의 삶과 가르침 / 김경수
지자체의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