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이야기
밀양시 단장면 영남 알프스 기슭에 표충사表忠寺가 있다. 사찰의 대문 격인 일주문을 지나면 표충사란 현판이 걸린 법당 비슷한 건물이 보이는데 잘 보면 표충사表忠寺가 아니고 표충사表忠祀 다. 법당에는 '대웅전'이나 '대광전' 같은 현판을 걸어놓지 절 이름을 새기지는 않는다. 절이 아니고 사당인 것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 대사와 함께 승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서산·기허 대사를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이후 의승장으로 수많은 공적을 남긴 사람들 가운데 유독 이들의 영정을 사찰에 모시고 나라에서 제수를 내려 제사 지내는 제도가 생겼다. 이른바 3 대사 사당인데 밀양 표충사에는 사명, 묘향산 보현사에는 서산, 공주 갑사에서는 영규를 주벽으로 하고 다른 두 분을 좌우에 배향하고 있다. 해남 대흥사에서는 영규 대신 행주산성에서 공을 세운 뇌묵당 처영을 모신다고 한다.
주벽主壁 : 사당祠堂에 모신 여러 영정이나 위패 중에서 주장主張이 되는 인물
표충사 사당을 지나면 비로소 삼층 석탑과 함께 표충사寺의 중심 불전인 대광전이 나온다. 원래 이곳은 원효가 창건한 죽림사란 절이었는데 영정사로 개칭했다가 조선시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표충사당을 경내에 들이면서 절 이름까지 바뀌었다. 현종이 표충사 휘호를 내렸다. 절이 사당을 유치하면서 발전한 셈이다.
사명대사는 1544년 경남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풍천 임林씨 수성 공과 어머니 달성 서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학문이 성현의 마음을 배우는 데 있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유학을 배우는데 힘썼다. 당시 밀양은 조선 초 명신 변계량이 나왔으며 뒤에 다시 성리학의 종장 점필재 김종직이 배출되어 유교적 전통이 일찍부터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부모 사후 김천 직지사로 들어가서 신묵 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나이 18세에 승과에 합격하여 봉은사에 들어온 사명당은 불교 공부를 통하여 내적 충실을 다짐은 물론 한양의 사대부들과 활기차게 교유했다. 30세 무렵에 직지사 주지로 부임했다.
이어서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뿌리치고 묘향산 서산 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당시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머물고 있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성룡은 공문을 사방으로 보내 각각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하러 나오라고 독려했다. 사명대사는 공문을 불탁 위에 펴놓고 여러 승려들을 불러 모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쟁에 나서면 승려로서 살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나라를 버릴 수도 없는 고민을 짐작할 수 있다.
사명대사는 항마구국의 결심이 서자 2천 명의 승병을 모아 평안도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했다. 이듬해 명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평양성을 되찾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관이나 의병에 비길 수 없이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의승병들이 초기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게 된 요인으로, 산사 생활을 통해 신체를 단련했고, 산천을 운유해서 지리에 밝고, 처자에 대한 부담이 없는 승려의 이점을 드는 의견도 있다.
사명당은 선교양종판사에 오르고 그 뒤 네 차례나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서 적장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한다.
가등청정 : 조선에는 무엇이 보배이며 보물인가?
사명대사 : 우리는 군자의 나라라서 도덕을 높이 숭상하고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베와 곡식을 중히 여기고 금은 주옥을 좋아하지 않으니 보배가 없다.
가등청정 : 그래도 모두가 갖기를 원하는 귀한 것이 있을 것 아닌가?
사명대사 : 그렇다. 그것은 일본에는 있고 우리나라에는 없다.
가등청정 : 그것이 무엇인가? 왜 일본에 있는가?
사명대사 : 장군! 당신의 머리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에 천금을 걸고 베어 오길 원하니 어찌 보배가 아니겠는가.
사명대사가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과 담판하면서 나누었다는 유명한 대화의 일단이다. 사명대사의 대담한 배포를 짐작할 수 있는 이 일화는 허균이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석장비문에도 나와있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서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경찰서장이 네 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합천 해인사 홍제암에 있다.
중추부동지사에 오른 사명대사는 선조의 명으로 1604년 국서를 지참하고 강화 조약을 위한 사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간다. 덕천가강과 담판하여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하는 외교 역량도 발휘했다.
사명대사는 종교 지도자로서, 군 지휘관으로서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매우 폭넓고 다양한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뜨거운 방에서 고드름을 달고 있었다는 등 허구적인 설화 속에 그 실제 모습이 오래도록 감추어져 왔다.
사명당은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향년 67세.
사명대사의 법명은 유정이고 법호는 송운, 종봉, 사명당이며 시호와 탑호는 자통홍제존자다.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밀양 무안면 일대에 관련 유적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주위에 기념관과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대사의 유물과 문집을 전시하고 있고 야외 공원에는 업적을 형상화한 조형물들이 있다.
나라에 환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됫박으로 흘린다는 표충비는 1700 년 대에 사명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땀방울이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에는 맺히지 않는다 하여 더욱 신비하게 여기고 있다.
억불숭유 통치 철학에 의해 불교를 박대하던 조선시대 조정이 환란을 만나 불교에 손을 벌리게 된 건 겸연쩍은 일이다. 하지만 마침 명종 때 문정왕후가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승려의 과거 시험에 해당하는 승과 제도를 부활시켰기에 결과적으로 사명대사나 서산대사 같은 인물을 중용할 수 있었고 불교계는 호국불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승과는 다시 폐지되었지만.
전 인류에게 닥친 코로나 재앙적 시국에 오히려 세속 진영이 종교를 바라보는 부정적 관점이 확장된 감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면 종교 예식에 대한 정부의 단속에 협조하고 사회의 지탄을 피하는 수준으로 우리 제도 종교는 low key로 일관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코로나에 피폭된 사회를 복구하는 현장에서 종교의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한다.
글 쓰는 데 참고한 책
의승군 사명대사 / 활안 한정섭
사명당 평전 / 조영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