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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17. 2022

'딸 캉 같이만 셍기(챙겨) 주소'

고성 지방 농요 물레소리


고려 말 문신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와 시험 재배에 성공한 고장이 경남 산청군 단성면이다. 문익점의 고향이기도 한 이 지역에 '목면시배유지' 사적이 있다. 훗날 남명 조식은 백성들의 의복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 문익점의 공덕을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에 견줄 만하다'라고 칭송했다. 조식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한 산청의 덕산이 단성면 바로 옆 동네다.


산청군에서는 매년 시월 목화 축제를 열어 이를 기념한다. 올해는 축제 마당에서 여러 모양의 목화 물레도 전시하고 있었다. 물레를 돌려 목화솜에서 실을 잣는다 (뽑아낸다). 출품작 중에 글씨가 빼곡한 물레가 눈에 띄어 내용을 물으니 농요라고 한다. 농요 이수자이기도 한 물레 장인이 경남 고성 지방에 구전되어 오는 농요를 자신이 제작한 물레의 살에 써 놓았다.


농요農謠는 전통시대에 농부들이 부르던 노동요의 일종이다. 힘든 농사일을 하며 여럿이 주거니 받거니 부르던 속요俗謠로서 경상도에서는 고성 농요와 예천 농요가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농요엔 서민들이 공유하는 생활 감정이 물씬 담겨 있다.


대개 농요는 벼농사 과정을 따라간다. 고성의 농요도 모판에서 모를 찌(뽑으)면서 부르는 모찌기 소리, 모를 심을 때 부르는 모심기소리, 보리타작하며 부르는 도리깨질 소리, 김맬 때 부르는 상사소리 및 방아타령 등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더해 부녀자들이 삼(베)을 삼으(실을 만들)면서 부르는 삼삼기 소리, 물레질하며 부르는 물레소리 등이 농요에 포함되었다. 여자들이 전담했던 (직물을 만들어 내는) 길쌈도 만만치 않은 노동이었던 듯하다.



고성 농요 이수자 이판철 씨 작품


울어마니 날 셍길세나, 시어마니 딸 셍길세나

셍기주소 셍기주소 딸캉 같이만 셍기주소

청천물이 술 거트면 씨아바니로 셍길긴데, 청천물이 술 아닐랑 씨아바니로 몬 셍기소

가랑잎이 떡거트몬 씨어마니로 셍길긴데, 가랑잎이 떡 아닐랑 씨어마니로 몬 셍기소

조각돌이 엿거트몬 씨누애기로 셍길긴데, 조각돌이 엿 아닐랑 씨누애기로 몬 셍기소

가렛대가 붓대더몬 씨아재로 셍길긴데, 가렛대가 붓 아닐랑 씨아재로 몬생기소

비오다가 볕나는날 울 어마니로 본듯하고, 볕나다가 비오는날 씨어매로 본듯하요


고성 물레소리 농요의 가사는 며느리가 시집살이 고초를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물레 돌리는 일보다 시집살이 자체가 고강도의 노동이었던 모양이다.


셍기주소 셍기주소 딸캉 같이만 셍기주소


시어머니에게 자기를 친딸처럼 챙겨달라면서 물레소리 농요는 시작한다.


샘물이 술이라면 시아버지... 가랑잎이 떡이라면 시어머니... 조약돌이 엿이라면 시누이... 삽자루가 붓이라면 시동생에게 갖다 드릴텐데...


[현재 사실의 반대 가정법 ]으로 농지거리 섞인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 구박을 받으면서도 가해자인 시집 식구를 일일이 헤아리며 더 잘 섬기지 못해 안타깝다니 이 무슨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말인가.


비가 오다 쨍하고 볕이 들면 친정 엄마 온 것 같고, 반대로 맑던 하늘에 비가 쏟아지면 시어머니 본 듯하네


그러다가 막판엔 작심이라도 한 듯 뼈 때리는 직유법으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비교 분석한 뒤 타령을 마무리한다. 시어머니를 향한 애원으로 시작한 소리는 시어머니에 대한 체념으로 끝났다.


집안일을 주부가 전담하던 시대에 노비가 없는 상민常民 집안의 며느리가 부담하는 육아와 가사 노동은 살인적이었다.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시어머니의 갑질은 심적 부담까지 가중시켰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신분으로 전환되는 순간 질곡은 보복적으로 대물림되었다. 상호 간에 교환하는 품앗이 임무 교대가 아니라 한 방향으로 계승되는 고난의 이어달리기였다.


당시 여자의 일생에서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그래서 고부간 노동의 생애 총량은 어차피 동일하다고 치더라도, 육체의 한계를 초과하는 과중한 노동은 아낙네의 젊은 시절을 인생의 암흑기로 만들었다. 나중에 도래할 안락함이 현재의 고통을 무마하지 못하고, 기억 속에 평생 수축되어 있을 현재의 극한 고통은 훗날의 보상과 상쇄되지 않는다.




이제 고부간의 상하 구도는 대표적인 구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며느리 밑에서 시집살이한다며 엄살 피우는 시어머니까지 생겼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 고부간의 긴장이 완전히 해소된 건 아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심심치 않게 '시월드' (시집)에서 벌어진 일들이 '물레소리'처럼 며느리들 간에 공유되고 있다. 다만 현대판 물레소리는 고통의 체념적 하소연보다는 (며느리 입장에서) 황당한 경험이나 무용담을 공유하고 공동체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당장 헤어져라', '연을 끊어라' 따위의 극단적이면서도 무책임한 댓글에서 주인공은 조금 위로받는다.


핵가족 사회로 바뀌면서 양측의 긴장으로 야기된 갈등을 해소할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지금 시대의 며느리와 시어머니 포함 시집 식구들 간의 마찰은 관계에 대한 이해의 괴리에서 출발한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가족적 규범이 제 입맛대로 각각이라는 얘기다. 전통시대의 가족 개념이 잔류하고 있는 우리 사회는 결혼을 통해 새롭게 형성된 가족관계를 연착륙시키는 기술이 성급하고도 서툴다.


우리는 남을 혈연관계로 은유함으로써 친밀함을 과시하는 정서가 있다. 거래처와 소주 두어 병 나누어 마시고 의기가 투합하면 형님 동생을 선언한다. 새 식구가 된 며느리, 사위에게 작위라도 수여하듯이 딸 아들을 삼으면 그들이 동화되는 과정이 단축될 거라고 믿는다. 되레 현실에서는 오글거리는 허풍이 가족관계에 착시 현상을 초래하고 혼란을 더한다.


예식장에서 주례가 성혼 선언문을 읽었다고 해서 며느리가 갑자기 딸이 될 수는 없다. 사위를 아들이라고 우기면 실망과 부작용이 생긴다. 가족은 혈연과 결혼으로 탄생한다. 아들과 사위, 며느리와 딸은 태생적으로 관계가 각기 다른 가족이다. 친소親疎의 정도를 단선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장인 장모를 아버지 어머니로 퉁쳐서 부르는 요즘의 관습은 (친자식이 적어져서) 혈족을 부풀리고 싶은 욕심과 혈연관계가 친밀도의 최상급이라는 믿음과 관계있다.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있는가 하면 웬수 같은 아들도 있다. 시가와 처가에 극진한 이 시대의 많은 며느리와 사위는 배우자의 가족 또한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지 졸지에 립 서비스로 입양된 딸 아들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짝퉁 피붙이를 연출해서 관계가 급조될 만큼 우리 인간이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상대방을 구슬릴 때 날리는 청탁성 교언巧言 (립 서비스) 중에 혈연에 빗대는 수법이 예나 지금이나 인기 있다.


물레소리 시절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딸을 사칭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방향이 바뀌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딸이라고 세뇌 시키고,


식당에 가서 밑반찬 리필이 아쉬우면 이모님을 찾는다.


단, 혈연관계가 막대한 유산으로 환전되는 재벌 집안에서는 금기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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