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 지명
산청읍에서 59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면 덕천강 양옆으로 들어선 마을들이 보인다. 덕천강은 지리산에서 발원해서 산청군을 거쳐 남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삼장 초등학교를 조금 지나자 강 건너편으로 강을 끼고 길쭉하게 형성된 부락이 눈에 띄었다.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다리를 건너니 친절하게도 마을 입구에 안내도가 서있는데 그림 지도다. 지방에 가면 이런 그림 안내도를 더러 보는데 어디는 아예 가옥 위치에다 주민 이름까지 표시해 놓았다. 서당마을 안내도에 나와있는 동네 이름들이 정겹고 재미있다. 여시밭골, 큰갓골, 깨밭골... 마치 예전에 들어본 듯, 살아본 듯 기시감을 준다.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덕교리 서당마을
차를 세우고 둔덕을 따라 마을로 들어가는데 인적이 없다. 요새는 시골 마을 어디 가나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 강가 감나무 밑에 사람이 보이길래 가까이 가니 한 남자가 내게 먼저 고개를 까딱한다. 마을에 낯선 이가 나타나면 우선 뭐 하는 사람인가 하고 빤히 쳐다보는데 이 사람은 좀 다르다. 농촌 마을은 주거지와 직장을 공유하고 때로는 혈연까지 얽히는 공동체다. 자연히 외지인은 눈에 띄게 마련이고 경계 대상이다. 인사를 건네준 30 대 남자에게 이 마을에 오래 살았냐면서 말을 붙였더니 잘 못 알아듣는 눈치다. 태국에서 왔단다. 어쩐지... 내가 코쿤캅 하니까 저쪽이 자동으로 손을 모은다.
마을 안으로 더 들어가니 한 노인이 골목길에서 감을 따고 있다. 마을에 대해 물어보자 여기 들어온 지는 십 수년 되는데 잘 모른다면서 방금 딴 감을 하나 쥐여준다. 그래도 안 가고 서 있으니까 한 개를 더 안긴다. 일단 오늘은 철수.
서당마을이 속해있는 삼장면 면사무소를 검색했다. 요즘 공기관의 홈페이지엔 조직도는 물론 각 부서 직원의 담당 업무와 전화번호까지 적나라하게 공개되어 있다. 공무원들이 참 성가시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루고 있다가 산청을 떠나기 며칠 안 남았을 때 면사무소에 전화했다. 일전에 원지에서 겪은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서당마을의 안내도를 보고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했다고 공손하게 설명했다. 한창 바쁠 관공서 직원에게 여행자라고 소개하자니 좀 나른하기는 했지만 관광객 유치는 요즘 지자체의 주요 관심사다. 담당자가 싹싹하게도 한번 알아보고 나서 전화해 주겠다고 한다.
면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서당마을 이장 연락처를 주면서 지금이 감 수확철이니 (낮에 하지 말고) 저녁때 전화하라고 몇 번 당부한다. 주민에게 민폐 끼치지 않으려는 지자체 직원의 노심이 역력하다. 하필 지금이 일 년 중 제일 바쁜 때라고 한다.
나는 살면서 유난히 '하필'의 상황에 자주 처한다. 예를 들면 '마침 잘 왔다.'가 아니라, '하필 오늘이냐.'다. '가는 날이 장날', '머피의 법칙'을 감안하더라도 대체적으로 때를 잘 못 맞춘다는 얘기다.
누구나 한 번쯤 그 '때'를 알지 못해서 혹은 놓쳐서 일을 그르친 경험이 있다. 동양의 철학 고전 주역周易에서는 세상의 길흉화복이 모두 때時(=타이밍)와 결부되어 있다고 한다. 나설 때인지, 물러날 때인지, 기다릴 때인지를 판단하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때에 맞추어서 처신하는 걸 시중時中이라고 한다.
산청을 떠나기 전 날 마을 입구에서 서당리의 이장을 만나 동네 이름에 대한 유래를 들었다. 운 좋게도 마을 안내도를 직접 제작했다는 이장으로부터 저자 직강을 듣게 되었다.
'산하실'과 '찬새미' 마을이 있었는데 농촌 인구 감소로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서당마을로 합쳤다고 한다. 예전부터 마을 중심에 서재가 있어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고.
이장이 수년 전에 마을 지도를 그리면서 구전되어 오던 마을 안의 동네 이름을 채록해서 올렸는데 이미 마을의 원로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유래를 알 수 없는 이름도 있더라고 했다. '모름실'처럼.
여시밭골은 여우, 깨밭골은 깨가 많아서... 정도는 나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가팔라서 갓골, 마을 바깥쪽이라 바밭골, 똥뫼는 낮은 둔덕 따위는 설명을 안 듣고 짐작하기가 어렵다. 강 건너 찬새미 마을엔 옛날부터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생수 공장 두 곳이 서있다. 지도에는 없지만 물가리미는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있는 써리봉에서 물길이 갈라진 지점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지명의 유래를 짚어 올라가면 대개 대전 - 한밭처럼 우리말 이름으로 연결된다. 순우리말 지명은 흔히 '울', '실', '골', '말' 등으로 끝나는데 지방을 여행하면서 토착민들과 얘기해 보면 ‘헤겡이골’, ‘노루울’, ‘밤실’, ‘개롤’ 같은 옛 고유 지명이 흘러나온다. … 조상들 삶의 모습, 환경과 문화가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는 소중한 우리말 땅, 마을 이름들은 머지않아 그 땅에 묻히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머내', '갓골', '두물머리' 같은 순우리말 지명은 고유명사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된다. 지형에서 유래한 지명은 가보지 않고도 마을의 형세를 연상할 수 있게 해준다.
'까치울', '노루울' 하면 긴 설명이 필요 없지만 '작곡리', '노곡리'라고 해버리면 뜨악하다.
'찬새미 마을'도 '냉천리'로 바꿔놓으면 정말 썰렁하다. 지도 앱을 쳐보면 전국에 '냉천리'가 수두룩하다.
'벌말'이 입체적인 그림이라면, '평촌'은 밋밋한 기호일 뿐이다. 그림엔 정보의 양이 풍부하지만, 기호에는 식별 기능만 있다.
바른 뜻을 경제적으로 전하는 우리말 지명은 기억하기 쉽고 확장성도 있다.
신라 경덕왕 때에 당나라식 한화漢化정책으로 우리나라의 땅 이름들이 한자어로 개명되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엔 가람과 뫼가 강과 산으로 바뀌었고.
경덕왕이나 조상 핑계만 댈 일이 아니다.
요즘 우리말 지명을 마케팅 차원에서 지역 축제나 시설물에 쓰는 시도는 있어도 행정지명으로 되돌리는 사례는 거의 없다. 되레, 마을을 대신하는 아파트 단지에 국적 불명의 서양식 이름이 등장한 지 오래다. 더샾, 아이파크, 아델리체, 일루미스테이트, 유로아일랜드...
아파트 업자는 그래야지 '있어 보인다'라며 촐싹거리고, 공공기관은 '민간 영역의 언어 자율권에 개입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밑으로 깐다.
지자체의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