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축음기 박물관에서
길가에 축음기 박물관 간판이 보여서 들어가 보았다.
소리를 모아놓는다는 뜻의 축음기蓄音機는 나 어릴 적의 전축보다도 한 세대 전의 오디오 기기로서 유성기留聲機라고도 불렀다. 사진으로만 보던, 개가 나팔관 소리를 듣는 RCA 빅터 사 제품을 직접 구경하고 들어보기까지 했다.
'얼음골 축음기 라디오 소리 박물관'은 여름에도 얼음이 언다는 밀양시 산내면 얼음골 근처에 있다.
안에 들어가니 축음기 말고도 테레비, 전화기 등 예전 음향기기가 1, 2 층 전시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헤어진 적이 없는데 '세월 따라 가버린' 오랜 친구를 만난듯하다. 이런 데 동년배와 같이 오면 옛날 얘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맞아... 이런 게 있었지...
라디오가 눈에 들어왔다. 어려서 라디오가 고가품은 아니었지만 없는 집도 꽤 있었다. 라디오 하나에 이웃의 여러 집이 스피커를 유선으로 연결해서 듣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제일 오래된 라디오는 나무 케이스로 된 육중한 진공관식 '라지오'다. 그 앞에 숨죽이고 앉아서 연속극을 들었다.
'동백아가씨', '섬 마을 선생님', '하숙생'은 60년 대 초 인기 라디오 연속극의 주제가였다. 매 회 방송극을 시작하기 전에 주제가를 틀어줘서 자연히 귀에 익었고 인기 가요가 되었다. 동백 아가씨는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했고.
라디오 드라마는 연극적인 청각 예술을 방송해서 청취자에게 전달한다. TV 드라마에 비해 돈이 덜 들고 화면이라는 제약이 없어 작업 환경이 유연하지만 무대 연극을 청각만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목소리 연기, 음악, 효과음 그리고 청취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라디오 드라마는 장면을 소리로만 묘사하고 전달하기 때문에 청취자가 DIY로 이미지를 형성하는 시각적 상상을 더해서 완성한다. 청취자가 얼마나 감각적, 시·공간적, 정서적 상상력을 발휘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좀 과장하자면 청취자는 시나리오를 읽고 극 중 캐릭터를 창조하는 영화감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상상은 현재 지각하지 않는 사물이나 현상을 기억이나 관념에 의해 재생시키는 마음의 작용이며, 한계가 없다. 소설을 영화화했을 때 독자가 소설을 읽으며 맘껏 상상했던 인물이나 장면이 영화에서 다르게 구현되면 실망한다. 영상은 상상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라디오 드라마도 청취자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내용을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그런지 종종 TV 프로그램이나 영화보다 감동이 오래가기도 한다.
TV를 볼 때 우리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다. 매우 낮은 수준의 의식을(=멍청히) 유지하면서 드라마가 우리의 두뇌를 함부로 누비게 (=세뇌) 내버려 두는 경향이 있다. 영화를 보다가 가끔 (나는 자주)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는 이유도 아마 이러한 수동적인 감상 태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TV를 볼 때보다 훨씬 더 많이 두뇌를 사용한다. 눈을 감고도 들을 수 있어서 편해 보이지만 다른 눈을 떠야 한다. 주어진 형상이 없는 자유로움 속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가동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고단한 작업을 계속한다.
성우는 라디오 드라마의 핵심적인 역할인 목소리 연기를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내면적 외형적 특성을 찾아내어 목소리만으로 인물을 창조해 낸다. 성우는 보이지 않는 희로애락의 감정과 몸짓까지도 목소리로 표현해서 듣는 이의 마음에 그림을 그려준다.
1970년대 이후 TV의 위상이 라디오를 넘어서면서 초창기엔 뉴스까지 진행했다고 하는 우리나라 성우의 활동영역은 줄었다. 오래전 얘기지만 TV 개국 당시 배우들이 모자라게 되면서 TV 탤런트로 갈아탄 성우들도 더러 있다.
쌀이 부족했던 궁핍한 시절에 구황식품으로 먹었던 곤드레 밥을 오늘날 다시 찾는 이유는 음식의 독특한 맛과 건강식에 있다. 기술의 발달로 거의 모든 것이 영상화되어 가는 추세에서도 아직 'KBS 무대', '라디오 문학관' 같은 라디오 드라마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이유는 특별한 매력을 못 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만 현란한 영상으로 상상을 차단해 버리는 횡포에 저항하는 라디오 드라마 애청자들이 있다.
라디오 드라마는 TV 드라마의 대용품이 아닌 독창적인 장르로서 계속 발전할 수 있다. 'K 라디오 드라마'의 수출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라디오 드라마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밥 먹는 연기나 키스 신을 소리로 구현하려고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길에서 택시를 잡을 때 '택시' 하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라디오 드라마가 영상물에게 '저는 이것밖에 안 돼요'하고 무릎 꿇는 것과 같다. 청각 예술의 독자적인 장르를 확보하려면 이 정도는 각본이나 우회 연기로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차원 높은 연출로 오히려 영상보다 고급스럽게 넘어갈 수도 있다. 청취자가 상상력이라는 카드를 들고 기꺼이 협업할 자세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연예계에서 가수가 영화에 출연하는 등 영역 간 경계가 무너지고 있지만, 성우의 역할은 아나운서나 탤런트가 대체하기 어렵다. 발성 훈련을 받은 성우의 전문성은 비전문가가 들어도 분명히 구별된다.
요즘 방송하는 어떤 라디오 드라마에선 아나운서가 드라마의 도입부를 읽는다. 마치 연극의 막이 올라갔는데 배우가 아닌 극단의 직원이 무대에 올라와 독백을 하는 것과 같다. 비연기자가 어설프게 극에 참여하면 감상하는 사람의 집중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사정이 있겠지만 혹시 작품성과 관계없는 방송국의 집안 사정이 아니었으면 한다.
영상 시대에 들어서며 성우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활동할 수 있는 분야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보도 제작에 참여한 '앵커'가 뉴스 프로그램까지 직접 진행한 지 오래되었다. 해당 취재기자에게 보도를 분배하고 필요시 전문가를 불러 의견을 묻는 입체적인 진행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TV 뉴스 앵커들은 자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미리 짜인 각본(그 사람들은 대본이라고 함)을 읽고 있다고 의심한다. 앵커와 기자가 미리 짜 놓은 대본에 따라 연기하면서 빈틈없이 쿵짝은 맞지만(=매끄러운 진행) 꾸민 티가 나고 현장감은 떨어진다. 연습하지 않은 연기는 어색하기 마련이다.
TV 뉴스 중간에 일어서서 진행하는 앵커들은 (프로그램에서 사용하지 않는) 볼펜이나 대문짝만 한 A4지 또는 둘 다를 손에 들고 있다. '손 둘 바'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을 말할 때는 손이 저절로 따라가지만, 어설픈 연기를 할 때는 손이 따로 놀아서 무언가 쥐여 줘야 안정이 된다.
'약은 약사에게'
각본을 읽으며 연기하는 데는 전문 성우 따라갈 사람 없다. 차라리 (같은 회사 동료인 ) 성우가 뉴스 대본을 읽는 편이 앵커의 판에 박힌 진행보다 자연스러울 것 같다. 성우들이 내용에 따라 천연덕스럽게 감정을 섞어 유려한 목소리로 읽어주면 듣는 사람도 분심分心 없이 이해할 듯하다. 특히 요즘처럼 뉴스 내용이 지저분한 때 시청자들에게도 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뉴스도 드라마니까.
지자체의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