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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30. 2022

새해 결심을 실패하지 않는 비결

 정약용 따라 하면 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연말 즈음이면 많은 이들이 새해 결심을 작정한다. 요새는 운동이 제일 많고 저축, 다이어트, 공부, 금주, 금연 순서라고 한다.


1803년 말 강진에서 귀양 살던 정약용은 이 중에 공부를 선택했다.


강진에 있는 사의재 안내판 : 1803년 12월 10일 동지라고 씌어있으나 오류로 보인다. 사의재기 원문에는 11월 10일로 기록되어 있다.(時嘉慶八年冬十一月辛丑 初十日...)

1801년에 유배 간 정약용은 처음 4년간 강진의 주막집 방 한 칸을 얻어서 기거했는데, 감사하는 마음에서 거처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산은 사의재四宜齋가 네 가지를 마땅히 지켜야 할 방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사실상 갑자년(1804년)이 시작하는 1803년 겨울 11월 10일 동짓날 나는 주역周易의 건 괘를 읽었다.'라고 썼다. 찾아보니 1803년 음력 11월 10일은 양력으로 12월 23일이었고 동지가 맞다.


육십갑자의 마지막 해인 1803 계해년의 동짓날에 이미 새로운 60년의 출발선인 1804 갑자년이 시작되었다는 정약용 식의 인식이었다. 


어두운 산길을 걸을 때,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과 황혼이 덮이는 야음은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어서 음기가 극성한 절기지만 바꾸어 말하면 태양이 부활하고 양기가 새로 돋는 한 해의 과학적 시발점이기도 하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물극필반 物極必反의 원리를 직접 체험하는 시기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는 듯하다가도 돌아보면 황홀하고 어렴풋하여 들어갈 문을 찾을 수 없었다. 계해년 (1803) 늦봄부터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잡는 것 입으로 읊조리는 것, 마음으로 사색하는 것, 필묵으로 적는 것부터 밥상을 대하고 뒷간에 가는 것 손가락을 튕기고 배를 문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다.
친구 윤외심에게 보낸 편지, 정약용의 주역철학 / 황병기


정약용은 1803년 늦봄부터 겨울 동짓날 전까지 주역 연구에 무섭게 몰두했다. 추운 어느 겨울날 조선의 천재가 주막집에 딸린 단칸방에서 주역의 오묘한 이치를 깨치고 다시 건 괘로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건 괘는 주역의 첫 장이다. 새해를 미리 맞이한 다산은 1804년 그의 역작 '주역사전四箋'의 초간본인 갑자본 8권을 완성한다. 정약용 하면 목민심서를 떠올리지만 정작 본인은 수많은 저술 중에 주역사전에 애착을 가졌다. '하늘의 도움을 받아썼다 天助之文字 '라고까지 자찬했다.



국제신문/정해왕의 주역으로 보는 세상                                                       태극기 © JJuni, Pixabay



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 등의 자연 현상을 막대(획)의 조합 여덟 종류로 상징하고 팔 괘八卦라고 부른다.


동양 철학 사상의 근간인 음과 양을 막대 모양 ( 붙어 있으면 양陽, 중간에 떨어져 있으면 음陰) 두 가지로 구별하고, 막대 세 개를 쌓아서 2 ³= 8 가지 경우의 수로 변화시킨 게 팔괘八卦다. 태극기에는 이 중에 네 개의 괘를 사용했는데, 왼쪽 대각선으로 하늘과 땅을 뜻하는 건乾 괘와 곤坤 괘 , 오른쪽 대각선으로 물과 불을 뜻하는 감坎 괘와 이離 괘가 마주 보고 있다.


여덟 괘 중에서 두 개씩 짝을 지어 위아래로 조합해서 8² = 64 가지의 막대 6개짜리 괘로 분화시켰다. 주역에서는 변화무쌍한 인간사 우여곡절의 가짓수를 압축해서 자연현상을 상징하는 64 개의 괘에 대입한다.


북드라망 출판사

건 괘는 64 괘의 으뜸이자 중심이 되는 괘다. 동양 고전은 대개 초初장에 무게가 실려있다. 논어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나 도덕경의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의 뜻을 통달하면 경전의 절반은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그대로 적용된다.


주역의 각 괘에는 한 개의 괘사와 여섯 개의 효사가 따라붙는데 괘사가 총론이라면 효사는 각 획(효爻)을 풀어주는 각론인 셈이다.


건 괘는 보다시피 양의 효(陽爻)로만 이루어졌다. 여기서 은 건어물의 건이 아니라 생명력의 근원을 의미한다. 하늘 천天자가 하늘의 모양이라면 건乾은 만물을 창조하는 하늘의 기능을 뜻한다. 도서관 같은 데 많이 걸려있는 액자 自彊不息 자강불식(스스로 강하여 쉬지 않는다.) 은 공자가 건 괘를 해석하면서 쓴 개념이다.


건 괘의 괘사는 잘 알려진 원, 형, 이, 정 元, 亨, 利, 貞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질서로 생장의 과정을 설명하고 사람의 일로 확장했다. 봄에 만물의 삶이 시작되듯 일을 시작하며, 여름에 만물이 무성해지듯 떨쳐 일어나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확장시키며, 가을에 만물이 결실하듯 일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며, 겨울에 만물이 정지하여 봄을 기다리듯 가만히 참고 견디면서 만물을 분별한다.


이어지는 효사는 여섯 개의 막대를 각각 설명하는 데 같은 양陽의 획이지만 때와 자리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이게 주역의 핵심 사상이기도 하다.


건 괘답게 각 효를 용으로 비유하고 있지만 다 같은 용이 아니다. 초구初九라고 불리는 맨 밑의 양효가 잠룡潛龍이다. 아직 설익었으니 함부로 나서지 말라면서 물용勿用이라고 했다. 장차 대권을 노린다는 이가 저녁에 동료들 만나서 소주 한잔 하면 다음 날 '잠룡이 꿈틀거린다'라고 기사가 나간다. 잠룡 물용으로 시작한 효사는 '비룡飛龍재천'을 찍고 여섯 번째 상구上九에서 '항룡亢龍이니 유회有悔하다'로 마감한다(일곱 번째 효는 생략).


건 괘에 등장하는 여러 용 중에 잠룡과 더불어 항룡도 많이 인용된다. 가서는 안 되는 끝인 에 이른 용은 뉘우침이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너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말고 올랐더라도 조심하라는 인간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충고다. 항룡은 늙어서 자리를 탐하지 말라고 할 때도 빗댄다.


조선왕조 실록에 보면 영조 7년, 특진관 ( 왕의 고문) 이덕수가 영조 면전에서  '왕이 스스로 자랑하고 여러 신하를 깔보면 과오가 날로 드러날 것'이라고 충언하면서 항룡유회를 인용했다. 서슬이 시퍼런 '현직' 비룡을 항룡으로 가정하면서 교육한 셈이다. 어느 안전이라고. 이덕수가 나이는 더 먹었어도 영조 또한 서른이 넘었으니 당시 임금치고 어린 축은 아니었다. 왕들은 겉만 번지르하지 말 많은 신하들 등쌀에 스트레스 꽤나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왕권과 신臣권의 조화를 통해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면서 세습된 군주로 인한 국정의 리스크를 관리했다.




사람들은 달력 바꿔 다는 때를 기점으로 맨 정신으론 불가능할 독한 계획을 세워놓고 해가 바뀌기만을 벼른다. 마치 아직 새해가 안되어서 실천하지 못한다는 듯이 폭음 폭식에다 담배 두 갑씩 피우면서 아직 시작도 안 한 금욕에다 '보복'부터 가하는 부류에 필자도 포함된다.


정월 초하루는 연속된 나날의 하루일 뿐 삶을 개혁하는 거사를 감행할 D-Day 가 되어야 할 각별한 이유가 없다. 사회가 편의상 분할한 시간 단위에 의존해서 고난도의 이상적 행동을 작심하는 설정은 희망적이기는 해도 추진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새해 결심의 생존율이 낮은 이유다.


결심은 실천이 가능하고 소박해야 한다. 오늘 당장 시작할 게 아니라고 비현실적으로 과격한 변화를 도모하는 객기는 며칠간 만족감을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연기할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되어 실감나는 스토리를 꾸며야 흥행이 된다.


결심의 성공은 특별한 날짜가 아니라 실천 의지에 달려있다. 의지가 강력하면 새해 같은 거 안 기다리고 오늘 밤부터 작전에 돌입할 수 있다.


정약용은 음력 11월 초 동짓날을 '사실상' 새해라고 선언했다. 이 양반은 (양반 맞다.) 새해도 되기 전 D-50을 D-Day로 당겨 잡고 그 난삽한 주역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 저술에 들어갔다. 앞서가는 사람은 다르다.


정약용을 따라 새해 결심을 앞당겨 동짓날부터 실천해 보자.


불과 열흘 정도 앞당기는 거지만 어려운 실천을 능동적으로 선행한다는 자부심으로 자기 자신이 기특해지니 성공 가능성이 올라간다. 그리고 한 번 실패하더라도 예행연습한 셈 치고 새해에 새 출발 할 찬스가 남아있다. 구차하게 음력 크리스마스 날부터 시작한다는 둥 둘러대지 않아도 된다. 정약용 말마따나 동짓날은 긍정의 기운이 자라기 시작하는 사실상의 새해 초하루가 아닌가.




다가오는 새해는 토끼띠 계묘년癸卯年입니다. 새해에 태어나는 아기들은 토끼띠고요, 오늘 현재 생존해 있는 계묘생은 모두 새해에 환갑을 맞게 되지요. 모처럼 돌아온 계묘년에 여러분들은 어떤 결심들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올 한 해 베풀어 주신 구독자님들의 관심에 감사드리면서 계묘년 새해에 아무쪼록 소망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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