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 점 이야기
'새꺄, 그거 다 미신이야!'
내가 주역을 배우고 있다니까 한 친구가 한 말이다. 수년 전 일.
주역이라고 하면 점술을 먼저 떠올리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동양 철학의 최고 경전인 주역에 대한 일반 인식과, 점치는 집이 동양 철학관 간판을 달고 있는 이유가 무관하지 않다. 간판에는 대개 사주 궁합 택일 작명 따위 메뉴가 딸려있다. 사주, 궁합은 주역 점이 아닌데.
주역이 수천 년 전에 길흉을 점치는 목적으로 출발한 건 사실이다. 진시황이 사상 통제를 목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분서(갱유)를 저지를 때도 주역은 의醫, 농農 등의 실용 서적과 함께 살아남았다. 당시 주역을 점술 책으로 여겼고 점술은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주역 점은 자신의 현 상황을 지배하고 있는 괘를 특정하기 위해 시초점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49개의 대나무 김발 같은 시초를 양손으로 잡고 여러 번 나누어서 여섯 개의 효, 즉 하나의 괘卦를 찾아낸다. 숫자가 관련되므로 상수역象數易이라고 부른다. 행위의 원인과 결과가 논리적이어야 안심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보면 시초점은 미신이지만 결과를 계시啓示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신비의 영역이 될 수도 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주역에 철학적인 해석이 더해지며 인간에게 필요한 윤리와 도덕에 대한 학문으로 점점 발전해 나갔다. 점서를 중심으로 하는 상수역과 구별해서 이를 의리역義理易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의리는 조폭 등 집단의 신의가 아니라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함). 점을 쳐서 괘를 찾는 우연한 과정을 비합리적이라고 인식한 왕필, 정이천 같은 유학자들이 의리역義理易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의리역은 사욕과 악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적 가치를 실천하는 지침서로 활용되었다. 64가지의 괘로 압축한 우주의 변화 원리에 인간사를 대입해서 눈앞의 현실에 매이지 않고 세상을 관조할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의 역할을 해주었다. 어찌 보면 의리역은 시초점 대신에 자신이 직접 현 상황을 투시해서 괘를 결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유학을 국가 운영의 기본 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은 관리를 양성하는 교과서였다. 그중에서도 주역은 조정에서 국사를 논할 때 즐겨 쓰는 판단의 매뉴얼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군신君臣간에 (대면, 비대면) 소통하면서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주역을 인용한 사례가 많이 발견되는데 대개 점서가 아닌 자기주장에 대한 철학적 논증(=폼나게 함)이 목적이었다.
예를 들면 주역 곤坤 괘의 첫째 효사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에 이른다履霜 堅氷至'는 악의 싹을 초기에 제거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많이 인용했다. 성종실록 131권에 보면 사간원에서 교만하고 방자한 한명회를 더 늦기 전에 처벌해달라고 상소하면서 '履霜'을 언급하고 있다.
점서를 목적으로 하는 상수역이건 윤리 도덕의 지침서인 의리역이건 간에 주역의 텍스트는 동일하고 양쪽 다 공히 흉한 일을 피하고 좋은 일에 나아가려는 피흉취길避凶就吉이 목적이다. 눈앞에 닥친 현실 문제를 다루는 지침서로 활용하는 데 있어 자신의 상황에 해당하는 괘를 집어내는 개념이 다를 뿐이다. 괘와 효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것은 상수역이나 의리역이나 마찬가지고.
해가 바뀌면 자기의 운세도 긍정적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며 새해 신수를 궁금해한다. 서점에서도 정초에 주역, 명리학 관련 책이 많이 나간다고 한다. 정치가, 사업가, 연예인들이 점치는 걸 유난히 밝히는 건 경쟁이 심하고 불확실한 환경에서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결단을 내가 아닌 하늘의 뜻에 미루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딜레마를 쉽게 탈출하려는 동기에서 점을 친다.
사람의 미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는 검증된 수단은 없다. 앞 일을 귀신같이 맞춘다는 용한 점쟁이는 존재할 수 없다. 사실이라면 점쟁이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삼차원 세계에서 인간은 공간은 이동할 수 있어도 시간은 오직 현재에만 머문다. 과거는 기억하고 미래는 예측할 뿐인데 정확도가 많이 떨어진다. 해와 달이 운행하는 자연의 법칙은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지만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가 정확한 답이다. 경제 수학 공식이 물리학 법칙보다 훨씬 복잡하고 딱 떨어지지도 않는다. 사람 일이기 때문이다.
앞날을 예측할 때는 점을 치든 고민을 하든 우선 지금 나의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주역으로 말하면 시방 내가 처해있는 괘를 알아내는 작업인데, 상수역에서는 시초점으로 의리역에서는 사유를 통해서 찾아낸 다음 나설 때인지 물러설 때인지 아니면 가만히 서있을 땐가를 판단한다.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 현 위치를 알아야 지도를 읽든지 119를 부를 수 있다. 내비게이터는 위성으로 현 위치를 특정한 다음에 바른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다.
나를 아는 일이 쉽다면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애써 외치지 않았을 것이다. 스페인까지 가서 40일씩 걸어도 나를 찾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를 찾은 다음에 가는 게 좋다, 새로 찾은 나와의 차분한 대화를 위해.
그런데,
나를 알아가는 중에도 상황은 계속 바뀐다. 이 또한 주역의 핵심 사상이다. 오직 바뀌지 않는 진리가 세상만사 계속 바뀐다는 진리다.
내비게이터가 알려준 길도 지금 기준으로 최선이라는 얘기지 그 길에 사고가 나거나 차가 몰려들면 악몽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미래를 알아보는 건 고단하고 가성비 낮은 작업이다. 천지만물의 근원에 대해 아는 건 별로 없이 온통 의문만 안고 태어난 인류는 그냥 정직하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소화하는 게 최선인지도 모른다.
다산 정약용은 주역 점을 치는 취지를 하늘의 명을 청하여 순종하기 위한 품명지의稟命之義라고 정의했다. 천명을 엿보려는 탐명지의探命之義 는 하늘과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했다. 함부로 알려고 하다 다칠 수 있다는 경고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