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롭지 못한 죽음에 대한 표현
고통을 강조할 때 우리는 종종 '죽겠다'라는 보조 용언을 붙인다. 배고파 죽겠다. 추워 죽겠다... 뻥이 심하지만 실제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고통이긴 하다. 그러나 '미워 죽겠다', '귀여워 죽겠다'는 고통과 무관한 표현의 확장이다. 생 사람을 '쥑이'는 '무시무시한' 날씨나 몸매도 있다. 이쯤 되면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어에도 'bored to death (심심해 죽겠다)' 같은 표현이 있지만 일상 대화에서 우리 만큼 죽음을 자주 소환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는 정작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꺼려한다. 원초적으로 두려운 죽음을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고 한국인의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 일수도 있지만, 나는 우선 우리의 언어 습관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었다'의 높임말인 '돌아가셨다' 외에도 우리는 타국에 비해 유난히 죽음을 '분식'하는 경향이 있다.
저명인사의 경우 고인 생전의 사회적 지위와 명망을 반영해서 '서거', '작고', '타계', '별세' 등으로 죽음을 전하는 데 그 표현들 사이에 은근히 질서가 있다.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평등이라는 죽음마저 차별적으로 예우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죽은 이의 생애에 대한 사회의 평가가 엇갈리면서 갖다 붙이는 죽음의 '꼬리표'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일도 벌어진다. 서거냐 별세냐 아니면 그냥 사망이냐... 예송논쟁의 리메이크 버전이다.
미국 신문과 한국 신문의 사망 기사 제목을 비교한 전지연에 따르면 미국 신문은 “dies”,“dead”등 죽음을 직접 표현하는 금기어 사용이 많고, 한국 신문은 제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전하는 “사망”과 같은 표현 대신 “별세”,“타계”등의 어휘를 사용한 완곡어법을 선호한다고 한다. 본 연구를 위해 수집한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의 기사에서도 이러한 특성이 확인되었다. 중앙일보 100개의 사망 기사 중 외국인 고인 31명을 제외한 한국인 고인 69명의 사망 기사에서는 “사망”이라는 표현이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빈도 분석을 활용한 한·영 사망기사 특징 비교/조선대학교 신혜정
미국신문과 한국 신문의 사망 기사와 부고에서 사용되는 죽음에 대한 완곡어법의 차이 비교 연구 / 단국대학교 전지연
망자의 종교에 따라 소천, 선종, 타계 등으로 구별하는 건 납득이 가지만 지금 시대에 지위나 평판으로 죽음을 차등하는 관행은 소모적인 논란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언론의 입장에서는 실속 없는 용어 선택에 애쓰는 대신 '사망'처럼 중립적인 어휘로 죽음을 전하고 고인의 생년이나 업적을 알리는 편이 주관을 배제한 사실 중심의 보도 원칙에도 들어맞는다.
서울서부지검 형사1부는 다른 애완동물들을 해쳤다며 키우던 강아지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A(38)씨를 구속기소했다고 17일 밝혔다.
언론 기사
한국의 언론은 일반 사망 사건 사고를 보도하면서도 '죽음'은 물론 '사망'이라는 단어마저 쓰기를 어려워한다. 대신에 '숨을 거두다'나 '세상을 떠나다'와 같은 완곡한 표현을 동원해서 죽음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고 싶어 한다.
위 보도에서는 사람뿐 아니라 반려견에게까지 '죽였다'라는 소리를 '삼가'하고 생뚱맞은 '숨지게 했다'로 대체했다.
'숨지게 했다'는 요즘 언론에서 즐겨 쓰는 살해 사건의 서술어가 되었다. '~하게 하다'엔 제3의 대상에게 행동을 시키거나 부추긴다는 사동使動적 의미가 있다. 억지를 부리자면 강아지 보고 죽으라고 시킨 자살 방조로 곡해할 수도 있겠다.
언론 기사는 정확하고 / 간결하게 써야 한다. 위에서 인용한 강아지 기사는 '때려죽였다'라는 '금기어'를 피하려다 정확하지도 않고 / 간결하지도 않은 문장이 되었다.
네이버 뉴스에서 '죽었다'(왼쪽)와 '숨졌다'(오른쪽)를 검색해 봤다.
'죽은' 존재 중에 사람은 터키 이재민과 북한의 아사자뿐이고 나머지는 '법', '태종 이방원의 말', '민주주의' , '거북이' 그리고 '거짓말로 죽었다고 한 아빠'였다. 그 외 죽은 사람들은 모두 '숨졌다'.
'죽다' , '죽이다'는 욕설이나 비속어가 아닌 일상적인 표준어다. 내용이 부정적이고 혐오적이라는 이유로 언론이 사용을 피한다고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나 살인이 줄어들지 않는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아무리 돌려 말해 봤자 한국의 자살률은 부동의 OECD 1위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언론 기사는 '사실'이지 '작품'이 아니다. 격식과 수식에 대한 강박으로 말을 빙빙 돌리면 멀쩡한 낱말이 금기어가 되고 막말이 된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22일 국정감사에서 과거 검찰의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패 죽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가 부적절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언론 기사
'패 죽이다'는 원색적이지만 고유어로 합성한 표준어다. 듣기에 섬찟해서 점잖은 자리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비속어도 아니다.(어차피 우리 국회가 고상한 현장은 아니다.) '패 죽이다'가 막말이면 '폭행치사'도 막말이어야 한다. 우리 고유어를 저급하게 여기는 언어 사대의 결과 이미 '죽다', '죽이다'는 욕이 되고 막말이 되고 죽어버렸다.
정치판에서 시급하게 퇴출해야 할 언행은 고함치는 짓이지 고유어 사용이 아니다. 국회의원들이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은 막말 이상의 야만적 폭력이다.
예전부터 한국에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른 나라에 비해 더욱 부담스럽게 다루던 정서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 죽은 사람을 '죽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나약한 풍조를 죽음에 대한 경외심이나 사자에 대한 예의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직설적 표현을 ('노골적'이라고 흉보며) 우회하는 용열 맞은 말습관이 만연하면서, 중립적인 어휘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절하되고 설 자리가 없어진 탓이 더 크다. 그릇된 언어 습관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