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에 대한 탐구
외국에서 혼자 살면서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었노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감기처럼 해로울 정도로 심하거나 참기 어려운 걸 '지독至毒하다'고들 표현한다. 객지에서 좀 쓸쓸했던 거 가지고 허풍 떤다 할 수 있지만 왈칵 밀려들어오는 외로움에 침몰되면 신체적인 면역력까지 떨어뜨린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오류가 하드웨어까지 고장 내는 식이다.
고독하게 지낸다고 다 외로운 건 아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래도 연락 끊지 않고 지내면 외로움을 덜 느낀다.
언제나 주위에 많은 사람을 몰고 다니는 인기 연예인이 고독하지는 않아도 외로울 수 있다. 테레비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꽁지머리 자연인보다 법인에 예속되어서 허둥대는 도시의 자연인이 더 외로울지도 모른다.
고독은 상태이고 외로움은 감정이다. 외로움과 고독 사이에 상관관계는 있어도 인과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 회사, 국가, 짐승이 아닌 - 사람들과의 '관계'에 장애가 생길 때 자아에 대한 불안이나 공허감이 생기는데 이를 외로움이라고 한다.
도대체 관계가 뭐길래 그러나.
개인을 '생물학적으로 결합된 독립된 개체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연결된 총체의 작은 파편'이라고 가정하면,
그 연결 고리가 바로 관계가 되며, 관계를 통해 비로소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완성된다.
바꿔 말해서 관계가 빈곤한 인간은 미완성의 존재이고, 이에 대한 불안감이 바로 외로운 감정의 핵심이란 얘기다. 외로움은 연결이 결핍된 상태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연결된 총체'에서 이탈된 자아에 대한 연민으로 시작된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전제하면, 인간이 혼자 느낄 수 있는 가장 괴로운 감정이 외로움이며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정신 상태라는 학설을 이해할 수 있다.
외로운 이들의 행동들에서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갈망하고 복구하려는 기제를 발견함으로써 '사람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라는 가설을 입증해 본다.
가설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남이가
낯설지 않은 주장이다.
영국의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존 던 John Donne은 명상록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라 대륙의 한 조각'이라고 했다 (No man is an island, entire of itself; every man is a piece of the continent...). 독립된 섬이라고 잰 체해봐야 물 밑에선 결국 하나의 대륙으로 붙어있더라는 얘기일까.
류시화 시인의 (되게 두꺼운)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서 소개한 인디언의 인사말 '미타쿠예 오야신'은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외로운 이들의 행동
사례 1: [헤어지기 싫어한다]
아이들이 잠들기 싫어하는 첫째 이유는 식구들과 헤어지는 게 섭섭해서 그렇다.(고 믿는다.) 나도 어려서 그랬으니까. 어른이 되어서도 헤어지는 과정은 부자연스럽다.
함께 잡담을 하며 시간을 죽이다가 시계를 보고 짐짓 놀라는 척을 한다든지,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일어설 이유를 선포하며 힘겹게 이별의 명분을 만들어낸다. 안 그러면 영원히 같이 있기라고 할 것처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과 헤어질 때도 또 보자, 연락해... 해가며 부질없이 나중을 기약한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물귀신처럼 바짓가랑이 잡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의 비슷한 말은 '외로운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부류다.
헤어질 때 인사는 만날 때 보다 복잡하고 어색하다.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이에도 또 보자는 말이 편안하다. 언제 점심이래도 한번, 소주 한 잔, 한번 찾아와, 전화해 따위의 빈말과 희망이 뒤섞여 분간이 안 되는 말을 곧이듣고 행동에 옮기면 썰렁해질 수 있다.
집에 왔다 가는 손님을 배웅할 때 바로 휙 돌아서면 야박하다.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서로 붙들고 주고받는 대화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거나 집안에서 이미 한차례 했던 얘기들이다. 밤 깊어 가는 집 앞 공터에서의 송별 의식은 동서양 공히 삼십 분이 기본이다.
필자 브런치 Jul 24. 2021/ https://brunch.co.kr/@hhjo/170
사례 2 : [자기 자랑한다]
인간관계가 부실하면 자아 존중감이 낮고 열등감에 빠진다. 위축된 자아를 보상받기 위해 자신이나 가족의 지식, 성과, 소유물 따위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또는 살아왔다)는 걸 과시한다.
요즘 과도한 자기 관찰 (=셀카)이나 소셜 미디어 활동도 원자화原子化 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해 주목받으려는 집단적 외로움의 증후라고 볼 수 있다.
과장된 자기 홍보는 다른 사람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해서 관계를 복구해 보려는 시도다. 자기 자랑, 자식 자랑은 외롭다는 신호다. 인내를 갖고 들어주자.
사례 3 : [소속감에 갈급이 난다]
새치기 안 하고 정직하게 줄을 섰다가 바로 앞에서 잘려서 황당했던 기억이 누구나 한두 번씩 있다. 성실하게 법을 지키다 오히려 불이익을 받은 경험이 소외감의 원인이 되고 연대를 자극한다.
우리 사회가 유난히 연연해 하는 연줄은 약자들이 기득권 세력의 일방적인 관계 단절 (=따돌림)로부터 자기를 구하기 위하여 형성하는 보호막이자 기득권의 리그에 재진입하는 연결 수단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의 하나인 소속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외로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의존적으로 가족, 친구, 동료, 커뮤니티 등과의 연결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외로울수록 소속감에 목말라한다.
사례 4 : [자작自酌] =혼술
사회적인 연결의 욕구가 좌절되거나 관계에 피로감을 느끼면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을 피하거나 아예 말을 하지 않는다. 외로운 이들의 또 하나의 특징인 말 없음은 외로움을 감추는 방어적인 메커니즘이 될 수도 있다.
술은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도와주는 사교적 수단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사회적 상호작용을 피하는 이들은 타인과 포기한 연결을 자기 자신에게 시도하면서 혼술의 도움을 받는다.
혼술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할 수 있어 자기와의 연결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자기 파괴적인 폭음, 의존증 등에 빠질 위험이 있다. 사회적 회피는 외로움을 악순환시킬 뿐이다. 가수 이장희 말마따나 차라리 '두 눈을 꼭 감고 나즈막히 소리 내어 휘파람을' 부는 게 안전하다, 외롭다고 느낄 땐.
가설을 입증함
본능적으로 관계에 애착을 느끼며 단절로 인한 외로움을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염려하는 사례들을 탐구하면서,
원인에서 결과에 이르는 외로움의 생태계에서 연결과 관계가 일관성 있게 중심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을 확인하고,
외로움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이상으로 [사람들을 모두 연결 ] 시키는 구동 에너지라는 잠정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외로움을 그리 오래 못 견딘다는 사실이다. 요즘처럼 사회 전체가 만성적으로 외로움을 타다 보면 연결 시스템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에 오류가 생기고 시스템 운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사람들이 보이는 참으로 다양한, 때로는 해괴한 짓들이 '외로워서 그런 거야' 하면 대개 설명이 된다. 우리가 간병인이 되어 그들을 꼭 안아줘야 하는 이유다.
위에서 인용한 존 던 John Donne 명상록의 구절은 이렇게 맺는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조종弔鐘)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서 울리는 것이니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상여 소리 난다고 내다볼 것 없다. 남의 얘기 아니거든.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
다시 류시화 시인의 책 제목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와 신기하게도 나란히 같이 간다.
헤밍웨이는 구절의 한 대목을 가져다가 소설의 제목으로 썼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 알고 나면 섬찟한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