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에서 만난 사람
의병 대장 곽재우郭再祐는 경남 의령 세간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키고 왜병을 막은 곳도 의령 땅이다. 그래서 그런지 의령읍에 의병탑과 의병 박물관이 있고 의령군의 길은 의병로로 통한다.
곽재우의 본향은 경북 현풍이지만 아버지 곽월은 당시 풍습(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에 따라 의령의 처가에 와서 살았다. 곽재우의 외가는 부호였는데 어머니 진주 강씨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처가의 가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곽재우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고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다. 공부를 하다 여가가 생기면 활쏘기와 말타기를 하거나 병서兵書를 익혔다고 한다.
곽재우는 그의 나이 열여섯 살 때 남명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해서 일찍부터 조식의 문하가 되었다. 조식이 첫째 부인에게서 얻은 딸이 낳은 두 자매 중 막내가 곽재우의 부인이다. 조식은 외손녀들의 배필감을 직접 골랐다는데 첫째 외손녀의 부군이 나중에 대사헌을 지낸 김우옹이다. 곽재우의 손위 동서가 된다. 두 사람 모두 남명 조식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곽재우는 34세 때 과거에 2 등으로 급제했으나 선조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과거 시험의 출제가 '당나라 태종이 궐에서 활쏘기를 가르친 일에 대해 논하라' (당 태종 교사 전정론 唐太宗敎射殿庭論)였는데, '임금도 마땅히 문무를 겸전(비)해야 한다'라고 써낸 곽재우의 답안이 문제가 되었다. 선조가 보고서 무예를 익히지 못한 자신을 조롱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7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과거 급제가 파방 (취소) 된 후 곽재우는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기강 (지금 의령 돈지)으로 내려가 은거에 들어간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적이 난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난 지 열흘도 안된 4월 22일, 곽재우는 의령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장정 10여 명과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합쳐 50여 명 남짓한 조촐한 병력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나중에 의병의 규모는 2천 명까지 늘어났다. 다른 지방의 의병 봉기에도 촉매제 역할을 했다.
곽재우는 전술적 관점으로 볼 때 완벽에 가까운 게릴라전, 유격전을 펼쳤던 지휘관으로 직접적인 전투뿐 아니라 심리전, 기만전술까지 능숙하게 수행했다.
의령 정암진(鼎岩津·솥바위 나루, 지금 정암리) 전투가 유명하다. 곽재우는 남강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해 화살 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도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군은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이를 지켜보던 곽재우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은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왜군은 다음날 잘못 표시된 표지목을 따라가다 늪지로 들어섰고 마침내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에게 전멸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정암진의 승첩으로 경상우도 ( 한양에서 보는 방향으로 오른쪽, 진주· 의령· 산청 등 )를 막아서 왜군이 전라도 곡창으로 진출하는 통로를 차단했다.
일본이 조선 침략전쟁에서 패배한 대표적인 2 대 요인으로 곽재우 의병장과 이순신 장군의 활약을 꼽고 있다.
왜군이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는 데 실패하고, 바다에서는 제해권을 잡지 못해 임진왜란이 장기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과 급제를 황당한 이유로 취소당하고 초야에 묻혀있던 문사文士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과 싸운 동기와 배경이 궁금하다.
동기
임란 초 경상 감사 김수를 비롯한 대부분의 고을 수령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피신해 버리자 곽재우는 격문을 보내 성토하고 분개했다.
조선시대에는 부, 군, 현 등 고을 단위로 주민이 지역을 방어하는 전통이 있었다. 동성 문중 중심의 향촌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던 사대부士大夫가 거주지를 중심으로 보신保身 / 보가保家 / 보촌保村의 자위책으로 일으킨 향토방위군이 바로 의병이다.
무엇보다도 곽재우에게는 대대로 녹을 먹으며 사회를 지배해 온 양반의 자식으로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지식인의 양심과 책임 의식이 있었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배경
곽재우는 토착 세력으로서 지역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적극 활용했다. 친가를 비롯한 외가, 처가의 부유한 가산과 보유하고 있던 다수의 노비 등 인적 물적 자원을 신속하게 동원해서 방황하는 관군까지 의병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16세기 성리학자로서 드물게 병서를 읽고 활쏘기 말타기를 익힌 남명 조식의 문하생들이 학문적 동문적으로 강력하게 결속하고 긴밀하게 협력했다.
남명 조식은 일찍이 전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산술 등을 비롯하여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병법을 가르치며 문무병중文武竝重 교육을 실시했다. 조식 사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상도 3대 의병장인 곽재우, 정인홍, 김면을 위시해서 조식의 제자 50여 명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선비 남명 조식(1501~1572)과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퇴계 이황(1501~1570)은 동갑이다. 퇴계는 예禮와 인仁을 강조한 반면, 바르고 곧은 마음 경敬과 정의를 세우는 의義가 남명 학문의 중심사상이다.
주역 곤坤괘의 문언전에 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라는 대목이 나온다. 군자는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바깥을 바르게 한다는 정신이다. 경敬이 자기를 지키는 도로서 내적 수양의 덕목이라면 의義는 시비를 아는 것으로서 외적 행위의 실천기준이 되는데, 성리학 체계 내에서 의義의 입지는 경敬에 비해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남명의 수양론은 의義에 기울고 있다.
성리학이 이론적 학문에 치중했지만, 남명 조식은 단순히 학문을 위한 학문이 아니고 학문을 통해 자신을 수양하고 현실에 적용한 실천적인 대학자였다. 칼 찬 선비 남명 조식 선생과 스승의 실천적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식이 관직을 사양하고 처사處士로 살며 평생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바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행동하는 지성 남명 조식은 도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결코 권력의 장식품은 되지 않겠다는 굳건한 절의가 있었다.
남명의 제자이자 외손서인 곽재우 역시 출사出仕 ( 관직에 나아감)에 연연하지 않았다. 적의 수급首級을 모두 강 속에 던져버리는 등 공功을 스스로 말하지도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 그를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였으나 임하기를 꺼렸다. 선조 32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했다가 이듬해 그만두었다. 이 문제로 조정의 탄핵을 받고 전남 영암으로 귀양을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방유도즉사邦有道則仕 방무도즉가권이회지邦無道則可卷而懷之.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도가 없으면 뜻을 거두어 숨어라.
논어 위령공 편 6장
조선왕조 실록을 검색하면 임진란이 발발한 첫해인 선조 25년, 조정에서 곽재우를 추켜세우고 관직에 천거하는 기사가 다수 나온다.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는 와중에 지방의 명망 사족이 자원해서 거병 후 전과를 내자 임금으로서 고마웠을 터이다. 더구나 선조는 자격지심으로 곽재우의 과거 급제를 부당하게 취소시킨 장본인 아닌가.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선조 25년 6월 28일
비변사가 곽재우에게 5품직을 주도록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곽재우(郭再祐)가 행한 일을 보면 방외(方外) 사람의 행위와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의병을 일으켜서 길을 막고 죽인 왜적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공을 스스로 말하지 않습니다. 5품의 관직(官職)을 제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5년 8월 16일
그러나 전란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곽재우에 대한 조정의 분위기가 바뀐다.
선조의 의심, 신료의 당쟁으로 곽재우는 수차례 조정과 대립하면서 상경과 낙향을 반복했다.
곽재우를 조방장에 임명할 것인지를 논의하다.
상이 전교하기를,
"곽재우(郭再祐)가 비록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처사를 보니 실로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하니,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중략
성상께서 그에게 이치에 어긋나고 명령을 어긴 일로 책망하신 것은 과연 지당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적변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싸움에 능한 한 명의 장수를 얻기도 몹시 어렵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 인해 버리고 쓰지 않는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 같습니다. 신들의 생각에 방어사를 제수하려 하였는데, 성교(聖敎)가 정녕하시어 그 엄격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니, 이것은 모두가 장사(將士)를 경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종전대로 조방장에 임용하는 것이 무방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 29년 2월 18일
정유재란이 수습되자 조정에서는 드디어 곽재우를 깎아내리기 시작한다. 벼슬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낙향해 버린 것을 문제 삼으면서 손을 봐야 된다고 군신이 연일 벼른다. 왕을 업신여겼다는 얘긴데, 그럴만하지 않은가?
경상 감사 한준겸이 소임을 저버린 겸부사 곽재우를 조처할 것을 아뢰다.
"울산(蔚山) 수관(守官)의 문장(文狀)에 ‘겸부사(兼府使)가 이달 10일 상소를 올린 뒤 15일에 본가(本家)를 항하여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겸부사 곽재우(郭再祐)는 곤수(閫帥)의 신분으로서 일기가 화창해져 변에 대비해야 될 때를 당하여 체직한다는 명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멋대로 소임을 버렸으니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럽습니다. 조정에서 급속히 조처하소서."
사신은 논한다. 곽재우는 병권(兵權)을 잡은 곤수로서 어진 정승이 쫓겨난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 가는 것을 걱정하던 끝에 강개한 마음으로 상소를 올려 숨김없이 다 말하였으니, 진실로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변방이 매우 위험한 때를 당하였으니 곤수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갑병(甲兵)을 훈련하며 기계(器械)를 정비하고 봉화(烽火)를 삼가서 적으로 하여금 감히 도모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굳건히 지킬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재우는 멋대로 방진(方鎭)을 버림으로써 국가의 방비를 맡길 데가 없게 만들었으니, 발끈 성내어 떠나는 데에 가깝지 않은가. 관사(官事)를 저버리고 국가를 저버린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선조 33년 2월 28일
사간원에서 경상 좌수사 곽재우를 추국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곤수는 이미 중임을 받아 병권을 전제(專制)하고 있으니 임의로 버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국법이 매우 엄할 뿐더러 신하의 의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상 좌수사 곽재우는 적을 토벌해야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화친을 통하기를 주장하면서 심지어 정백(鄭伯)이 어깨를 드러내고 양을 몰았다는 일까지 인용, 이를 문서에 드러내어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그리고는 소장을 올리자마자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려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잡아다가 추국하여 율(律)에 의거 죄를 정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 33년 2월 29일
의금부에서 곽재우에게 곤장을 쳐서 변방으로 내쫓자고 건의하니 선조는 그것 같고 되겠냐면서 한 술 더 뜬다.
의금부에서 곽재우에게 적용될 죄율에 대해 아뢰다.
의금부가 아뢰기를,"곽재우의 죄율(罪律)을 《대명률(大明律)》에 상고하여 보건대 천조관군조(擅調官軍條)에 ‘어보(御寶)에 의한 성지(聖旨)를 받들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임지(任地)를 떠날 수 없다. 이를 어긴 자는 장 일백(杖一百)에 먼 변방으로 보내어 충군(充軍)시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곽재우의 죄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하였다.
선조 33년 3월 20일
비변사가 유배 중인 장수들을 사면해서 그들의 뛰어난 기량을 '재활용'하자고 건의하자 선조는 대뜸 그렇게 하면 곽재우에게 상을 주는 게 된다며 일축해 버린다.
비변사에서 정배 중인 곽재우·박명현을 등용하는 일로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지난번 영상(領相)의 장계에서 죄인을 석방하여 장수로 정하라는 말이 있었는데, 누구를 가리킨 말인지 비변사로 하여금 회계하게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상에게 물어 보았더니, 박명현(朴名賢) 등이 죄를 짓고 호남에 정배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당세의 뛰어난 자들이니 잔약한 보(堡)에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게 두기보다는 차라리 파격적으로 조처하여 해진(海陣)으로 보내어, 배 한 척씩을 거느리고 주장(主將)에게 예속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곽재우 등은 정배된 죄인이니 법으로 보아 복역중인 군졸이다. 지금 그들을 영장(領將)으로 정한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상을 주는 격이니 불가할 것 같다."
선조 33년 6월 22일
왜란이 끝난 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대부분의 공功은 왕의 측근 신하들에게 돌아가고 의병장들에 대한 보상은 인색했다. 선조를 호위해서 의주까지 따라갔던 신하들은 86 명씩이나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책봉하면서, 전공戰功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도 의병대장 곽재우는 살아 있다는 이유로 찾아먹지 못했다.
영웅을 홀대하는 전통이 뿌리 깊다.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을 때 누가 목숨을 내놓고 보국保國하겠는가.
참고한 자료 : 조선왕조실록, 의병 박물관, 망우당 곽재우 ( 남명학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