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차례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한다'는 우리 속담은 재미있고 그럴싸하다. 우리 조상들의 봉제사奉祭祀에 대한 부담을 짐작할 수 있다. 땟거리가 없어도 일 년 제사에 쓸 벼는 남겨두는 것이 기본이었던 시대다. 조선시대에 제사 못 지내는 집을 관에서 지원하는 제도가 구휼정책의 일부였다는 게 이해가 간다.
우리 집도 제사를 자주 지냈다. 할아버지와 두 분의 할머니, 나중엔 아버지가 합류했다. 명절 차례까지 보태면 두 달에 한 번 꼴이다.
어려서는 제사 끝나고 음복할 산적이나 동그랑땡 같은 '진기한' 음식이 제사의 지루함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설과 추석 차례는 기제사에 비해 상이 소박하고 잔을 한 번만 올리므로 빨리 끝나는 재미가 있었다. 제주祭主인 아버지가 나지막하게 '차례는 단잔單盞이야' 할 때 위안이 되었다.
제사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이므로 손님을 초대해 대접하는 것과 절차의 골격이 같다.
손님을 부르고 음식飮食을 낼 때 술(飮)이 먼저다. 술은 빈속에 들어가야 제맛이니까. 기제사는 향을 피워 혼을 부르고 순서대로 초헌, 아헌, 종헌이라고 불리는 석 잔의 술을 올리고 나서 밥뚜껑을 열고 밥에 숟가락을 꽂는다.(계반삽시啓飯插匙)
차례는 명절 아침에 (기제사 지내는) 조상을 한자리에 모셔서 이름 그대로 차와 과일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차례상에 제철 음식을 간소하게 올리되 술은 한 잔만 올린다. 아침부터 여러 잔 걸치는 건 거북하다.
어떤 사람들이 명절 때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의아해했는데 실제 차례상을 기제사 못지않게 떡 벌어지게 차리는 집도 있더라.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유교 가치가 사회적 질서, 윤리의 기준이 되면서 관혼상제는 세속 규범에서 엄숙한 종교 의례로 발전했다. 특히 장례와 제사를 효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유교의 중요한 범절로 여기면서 형식이 강조되었다.
유교는 지배 계급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다. 따라서 유교적 가치의 준수가 양반의 위상과 연결되면서 제사의 규모가 부풀려지고 허례로 변질된 면이 있다. 나라에서 심지어 품계에 따라 기제사 봉사 대수를 통제하다 보니 (예, 3품 이상 4대), 집안 체면을 지키기 위한 제사의 뻥튀기가 성행했다(고 본다.).
중국 고전에도 특권이 되어버린 과도한 의식을 비판하고 간소한 제례를 계몽하는 내용이 더러 나온다.
주역의 산택 손 괘에서는 제사 음식의 가짓수보다는 정성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고, 논어의 팔일 편에서 공자는 당시 한 귀족이 분에 넘치게 천자 수준의 제례인 팔일무 춤을 주최하는걸(=꼴을) 비난하고 있다.
명절 후유증의 으뜸이 시댁에 가서 음식 장만하느라고 허리를 피지 못한 며느리의 울화병이다. 부부의 불화로 이어지며 가정의 평화를 해친다.
집안에서 남녀의 위상이 혁명적으로 뒤바뀐 지 오래지만 이 대목은 도돌이표다. 직장 다니는 며느리가 모처럼의 명절 연휴에 친하지도 않은 시댁 식구들 틈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리다 왔으니 오죽하랴.
혈연이 아니고 법적 (in-law)으로 편입한 가족을 진정한 구성원으로 동화시키는 데는 집안 차원의 각별한 유인책이 필요하다. 실상은 미련하게도 거꾸로 가고 있다. 반은 냉동에 들어가서 돌덩어리가 될 것이 뻔한 전 부치고 꼬치만 꿰다가 돌아간 새 식구는 다음 시댁 방문을 꺼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제 제사는 가문의 명예와 무관하다. 오늘날 차례의 역할은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명절을 맞아 한자리에 모여 우애 다지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자식도 배달시켜서 멕이는 판이다. 생판 보도 못한 남편 조상의 기름진 차례상을 수작업으로 차려야 한다는 논리는 조상조차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제사 음식의 종류를 줄이고 일상적인 식단으로 바꾸는 집이 늘고 있다. 조상들도 다이어트 중이다.
제사 관련 속담이 하나 더 생각난다.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한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
올해는 평화로운 추석을 빕니다.
(사진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