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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10. 2023

한글과 한국어의 수난

한글날만 되면

훈민정음 서문 / 출처 위키백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 시대에 국왕이 주도해서 새로운 글자를 발명하고 제정했다. 중국에 대한 문화적 항거라고도 볼 수 있는 용기 있고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한글은 뜻글자인 한자와는 체계가 다른 소리글자이며 그중에서도 음소문자다. 몇 개의 기본 요소에 가지를 치고 조립해서 만든 스물여덟 자음과 모음이라서 확장성이 크고 과학적이다. 디지털 시대를 미리 예견이나 한듯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혜안이 놀랍다.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우고 쓰기 편하게' 하기 위해 우리 글자를 만들었노라 하면서 훈민정음은 시작하고 있다. 

우리말이 중국 말과 다르다.
교육받지 못한 백성이 말을 한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쉽게 배우고 편하게 쓰라고 새롭게 28자를 만들었다.


당시의 지식과 자료는 모두 한문으로 기록되고 소통되었다. 한문은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사실상 인구의 10%도 안 되는 양반이 지식과 정보를 독점했다. 


한글이 반포되면서 조선은 비로소 독자적인 말과 글(言語)을 갖추게 되었다. 지배층이 배타적으로 획득해서 으스대며 사용하던 문자를 일반 백성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게 되면서 교육과 지식의 민주화를 이룰 계기가 되었건만... 거기까지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독점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한글을 홀대하고 고급 정보나 자료는 여전히 한문으로 간행했다. 반포 초기에 사서삼경 언해 四書三經諺解 등 중국 고전의 한글판이 나왔지만 평민들은 별로 읽지 않았다. 어차피 과거도 못 보는데 뭘. 


유럽은 달랐다. 


중세 유럽의 성경은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평민들이 성경을 직접 접하기 어려운 반면 성직자의 권위는 한층 강화되었다 (1960년 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만 해도 천주교 미사 때 라틴어만 사용했다고 함). 16세기에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성경의 유럽 각국어 번역이 활발해졌다. 평민들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니 종교적 평등이 이루어지고 유럽의 언어와 문화 발전이 촉진되었다. 


왕조 초기에 한글을 발명해 놓고도 조선의 지배계급은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 나라가 망할 때까지 한문에 매달렸다. 


19세기말 조선을 수 차례 찾은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기행문에서,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알파벳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식자층이 언문(한글)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한편, 어려운 언어(한문)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이 사고력을 발전시키거나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도록 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태생의 기록이 상세하게 기록된 문자는 세계에서 우리 한글이 유일하다고 한다. 영어를 포함해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자의 시원始原은 전설처럼 아득하다. 


그만큼 한글은 역사가 짧다. 한글이 문자로 대접받고 범용 된 지는 고작해야 해방 이후 80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고민하고 발전시킬 부분이 무한하다, 사장된 글자의 부활, 풀어쓰기, 띄어쓰기, 철자법 등. 그러려면 우선 부지런히 써야 하는 데도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다.


한글날만 되면 언론에서는 한글의 우수성과 함께 외국어 남용 등 우리말의 문제를 거론한다. 한글은 글자다. 글과 말의 문제가 다르지만 우리는 외국어에 의해 오염되고 있다는 점이 같다, 오백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앞에서 인용한 기행문에서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의) 교육받은 계층은 가능한 한 많은 중국 말을 그들의 대화에 끌어넣으려 한다'라고 했다. '중국 말'을 '영어'로 바꾸면 오늘날과 상황이 똑 닮았다. 조선시대에 우리말과 글을 밀어낸 한문의 자리에 이제는 영어가 들어섰다.




우리나라 거의 모든 도서관의 안내 창구엔  'INFORMATION'이 붙어있다. 우리나라 도서관 이용자의 99.99%는 한글을 상용한다. 전시회 안내장의 작가나 청첩장의 신랑 신부 이름을 영문으로 늘어놓아서 한참 들여다보고 '번역'해야 누군지 짐작한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에 이어 남미 볼리비아에서도 한글 표기 시범사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보도가 겸연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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