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에서 만난 사람들
전라남도 함평읍 경계에서 대동면으로 1 kM 정도 들어가면 길가에 함평 향교가 나오고 길 건너에 유림회관 건물이 서있다.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590-1.
지명에 '교촌', '교동', ' 교리' 등이 붙은 동네엔 향교나 향교 터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마비 뒤에 있는 외삼문外三門으로 들어가서 다시 비슷한 세 칸짜리 내삼문을 거치니 대성전이 나온다. 다른 향교처럼 마당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있다. 공자가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흔히 향교엔 강학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앞에 있고 뒤에 대성전大成殿이 물러서 있는 데 여기 함평 향교는 반대로 대성전을 앞에 배치했다.
조선 시대 향교鄕校는 훌륭한 유학자를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나라에서 설립한 관학官學 기관이었다. 크게 문묘와 학교로 나뉘며 두 공간 사이에 담을 쌓아 구분한다. 대성전으로 불리는 문묘文廟는 공자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른 유학자들을 배향해서 제사 지내는 곳이다.
대성전 앞 뜰에서 지역의 문화유산을 순회하면서 보수하고 있는 문화재 관리청 사람들을 만났다. 문화재에 고옥古屋도 포함되는데 사유재산이면서 문화재인 고옥을 관리하는데 애로가 많다고 한다.
길 건너 유림회관 1층 사무실에 들어가니 벽에 역대 전교의 사진이 걸려있다. 향교의 책임자를 전교典校라고 부른다. 마침 함평 향교의 전교는 행사 참석차 출타 중이었다. 집단이란 뜻이 있는 수풀 림林 자가 재미있다. 유림儒林, 사림士林, 총림叢林...
며칠 있다 다시 찾아가서 전교 김주환 옹을 만났다.
전교典校 : 지방 문묘를 수호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윤리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활동하는 향교의 책임자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림회관 입구에 세워놓은 입간판 '함평천지 만대번영' 을 가리키며 함평에 '천지天地'가 붙는 이유를 물으니, 다 함咸 평안할 평平, 모두 함께 어울려 편안한 세상이란 뜻이라고 설명해 준다.
전라도의 50여 고을의 지명을 넣어 만든 단가 호남가는 '함평천지' 로 시작하고, 함평의 전통 시장은 천지 시장, 고속도로 휴게소도 함평천지 휴게소... 함평엔 천지가 지천至賤이다.
함평 향교의 구조에 대해 물으니 전국 향교 234개소 거의가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앞에 있고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뒤편에 위치하는 데 여기 함평 향교를 비롯해서 나주, 전주 향교 등 몇 곳만 대성전이 명륜당보다 앞에 있는 전묘후학 前廟後學의 배치라고 한다.
향교는 세 칸의 문중 오른쪽 문 (입문入門)을 통해 들어간다.
'향교도 우측통행이네요' 하니까 전교는 손을 저으며 '그게 아니고, 가운데 문은 성현의 혼령만 출입하는 신문神門이므로 사람은 옆문으로만 드나들어요'
향교 같은 유교 시설물은 일반적으로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으로 출입하게 되어있다. 여기서 동, 서는 자연 방위가 아니고 안쪽에 자리한 주체의 관점, 즉 대성전에서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편을 동쪽으로 간주한다.
출입자 기준으로는 우측통행이지만, 주체의 기준으로는 좌측으로 들어오고 우측으로 나가는 개념이다.
유교 질서에서는 왼쪽이 우선이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서열이 높고, 좌청룡左靑龍 다음에 우백호右白虎다. 한문으로 된 성어에서도 좌고우면左顧右眄, 좌우지간左右之間, 좌충우돌左衝右突 등 ‘좌’가 먼저다, 방향을 헷갈린다는 우왕좌왕右往左往 빼고는.
어떻게 해서 전교를 맡게 되셨냐고 여쭈니 올해 82세 되신 김 옹은 서당에서 글 공부한 얘기를 들려준다. 당신의 엄부께서 5대 독자 외아들에게 전통적인 유교 교육만을 고집해서 학교 대신 서당만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고 산수 같은 학교 공부는 서당의 학동들에게 배웠다. 하도 학교에 가고 싶어서 가출을 했는데 부친이 세 가지 약속을 하셔서 돌아왔다. 그 세 가지가 안 때리겠다. 검정 운동화를 사주겠다. 그리고 학교 보내주겠다였다고. 김 옹은 국민학교를 건너뛰고 특별 전형으로 중학교에 들어갔다. 입학할 때 한 가지 조건이 붙었는데 학생들에게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한문을 가르치는 거였다. 동급생들에게 삼 년 내내 명심보감을 가르쳤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선비가 되고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치열한 학문적 경쟁이 있었다. 양반 자제들은 서당에 가서 훈장한테 회초리 맞아가면서 천자문을 외우는 게 교육의 시작이었다. 초등학교 개념인 서당을 다니다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향교나 서원으로 진학했다.
향교는 공립학교인 반면 서원書院은 사대부들이 세운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양쪽 다 강학 외에 유교 선현들 제사 지내는 일을 했는데, 향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조선의 선현을 모신 반면 서원은 조선의 대학자나 정치가를 배향했다.
서원이 늘어나면서 향교의 교육 기능은 쇠퇴하고 양반들의 특권을 보장하는 향촌 기구로 전락했다. 당시 부모들도 향교보다 사학인 서원을 선호했다. 특히 사림士林이 정치 주도권을 잡은 후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각 당파에 따르는 학맥과 연을 맺기 위해 서원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국에 있는 향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문을 닫아 걸어서 담장을 돌면서 안을 들여다봐야 하는 시설이 많다. 아마도 보존 편의를 위한 조치로 짐작한다.
향교는 문화유산이자 전통시대의 교육 기관이다. 박제해서 외형만을 유지하기보다는 현대 사회에 맞는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유교 경전을 재해석해서 청소년 인성 교육의 장으로 재활용할 수 있고 전통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다.
지자체 간에 향교 활용 사례나 성취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서로 정보를 교류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