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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27. 2023

[보령] 제발 금요일에 우리의 목을 쳐달라.

보령 갈매 못에서 만난 사람들




조선말 천주교 병인박해가 시작된 직후인 1866년 3월 30일, 다섯 명의 천주교 성직자와 신자가 충청 수영성 근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했다. 


1866년 흥선대원군 정권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하며 1872년까지 6년간 당시 8천 명 이상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 선교사들이 처형되었다.


일명 갈매 못이라 부르는 순교지의 오늘날 주소는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375-2 다. 갈매 못의 유래는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이름으로 '목마른 말에게 물을 먹이는 연못'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군문효수軍門梟首는 이미 처형된 이의 목을 죽고 난 이후에도 군문의 장대 위에 걸어 매달아 두는 매우 가혹한 처형 방법이다. 이 극형은 천주교 박해 당시 주로 외국인 선교사들을 비롯한 중죄인을 체포해 처형할 때에 가한 형벌 중의 하나였으며, 이와 같은 엄한 조치는 뭇 민중을 경계하는 뜻에서 취해졌다.


다블뤼 안토니오 안 주교 (48세), 위앵 마르티노 민 신부 (30세), 오메트르 베드로 오 신부(29세), 그리고 장주기 요셉 회장 (63세), 황석두 루카 회장( 53세)이  갈매 못에서 치명한 다섯 순교자들이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함께  상해에서 작은 나무배를 타고 충남의 강경에 도착하였다. 주교는 1846년 조선에서 목회를 시작한 이후 순교하기까지 17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불사전을 편찬하고 여러 천주교 서적을 집필했다. 합덕 거더리에서 그를 돕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붙잡혔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위앵 신부와 오메르트 신부는 스스로 주교가 붙잡힌 거더리로 찾아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한편 충북 배론에서 잡혀온 장주기 요셉은 다블뤼 주교와 함께 처형해 달라고 청하여 갈매 못 순교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 


대원군이 이들의 참수를 임금에게 상소해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당시 왕인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고 얼마 후에 명성황후와 혼인을 치르게 되어있어서, 도성에서 서양인들이 피를 흘리는 것이 국혼에 상서롭지 못하다는 무당의 의견에 따라 서울에서 250리 이상 떨어진 보령 고을 수영성으로 보내 처형하게 되었다. 


다섯 순교 성인은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3월 29일 목요일 지친 몸으로 충청 수영성에 도착했다. 포졸들은 인근 마을들을 돌며 조리 돌림 한 후에 이들을 처형하려고 했으나, 주님 수난 성 금요일에 죽게 해달라고 다블뤼 주교가 강청에 따라 다음 날인 3월 30일 금요일 갈매 못에서 처형이 집행되었다. 성 금요일 (GOOD FRIDAY)은 부활절 직전 금요일로서 천주교에서는 매년 이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과 죽음을 기념한다. 처형 이틀 후인 4월 1일, 일요일이 그 해 (1866년)의 부활절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망나니가 요구하는 높은 품삯을 주지 못해 무려 세 번의 칼을 받았고, 오 신부는 두 번, 나머지 민 신부, 황루카, 장요셉은 한 번 받았다고 한다.


갈매못 성지는 역사적으로 병인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순교한 곳일 뿐 아니라, 다블뤼 주교의 유품과 유물이 소장돼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성지이다. 순교자 기념비, 기념관, 사제관, 수녀원 등이 건립돼 있다.



참수당한 순교자들의 목을 하나씩 장깃대에 꽂아 똑바로 세워놓았고, 목이 잘린 몸은 그대로 두어 세상 사람들이 천주교를 경계하도록 하였다. 3일 후인 1866년 4월 2일 충청 수영의 지시에 따라 비신자들이 장깃대에서 순교자들의 머리를 내려 각각의 시신과 함께 인근 모래사장에 묻었다. 

당시 효수했던 자리에 하얀 십자가가 서 있다.


황석두 루카의 시신은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순교자는 갈매 못에서 10리가량 떨어진 오포리의 야산에 암장하였다. 


그러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이 여우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자 이화만 바오로가 신자들에게서 비용을 추렴하여 남포 서짓골 이화만 집 뒤편 담배밭으로 두 번째 이장했다. 


서짓골 성지


이후 순교자들의 유해는 1882년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 성당으로 보내졌다가 1900년  명동 성당 지하 묘역에 옮겨진 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식을 1년 앞둔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다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섯 순교자는 한국 천주교 200 주년을 맞은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한편 순교 성인들의 시신 이장에 앞장섰던 이화만과 그 아들들은 그 해 가을에 서울로 압송되어 무참히 맞아 죽어 시신이 버려졌다는 간단한 기록이 전해진다. 


병인박해를 주도한 흥선대원군은 원래 천주교를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 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입장을 바꾸고 박해 정책을 실시했다.


병인박해는 병인양요로 이어졌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을 문제 삼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했다. 병인양요를 계기로 대원군의 통상 거부 정책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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