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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20. 2023

[보령] 성주사 터와 최치원

보령에서 만난 사람들

입구인 중문에서 찍은 사진 : 오층 석탑 뒤에 금당 터가 있다.  / 금당에서 찍은 사진  : 삼층석탑들 뒤로 강당 터가 보인다.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 남쪽에 천년 고찰 성주사聖住寺의 절터(址)가 남아있다.  


원래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였는데 통일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구염 대사가 크게 중창하면서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소조불 ( 찰 흙으로 만든 불상 ) 조각과 백제, 신라 때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남쪽에서 보는 기준으로 중문-석등-오 층 석탑-금당 불대좌-3기의 삼층 석탑-강당 터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지금은 석탑과 금당 터, 강당 터만 남아있다. 우리나라 전통 목조 건축물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아니면 육이오 때 불타 없어지고 돌로 만든 유적만 남아있다. 



오합사 시기 가람 배치 모형 / 성주사 시기 가람 배치 모형


통일 신라 말기에 선종禪宗 불교 사찰이 전국에 9개 있었는데 이를 구산선문이라고 불렀다. 성주 산문이 그중 제일 규모가 제일 컸고  그 중심지가 바로 성주사였다.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가 선종인데 성주사를 중창한 무염이 당대 최고의 선승禪僧이었다고 한다. 반면 교종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인 '경전'을 근본으로 하여 경전을 이해하고 실천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한다.


무염은 신라 무열왕의 8세손인데 화엄승으로 시작하여 선종 승려로 입적하였다. 888년 무염이 성주사에서 입적하자 진성여왕은 무염에게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諡號와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신라시대 구산선문

절터의 북서쪽 비각 안에 국보 8호인 대낭혜 화상 탑비가 보존되어 있다. 


고운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에 의해 대낭혜 화상 (무염)의 행적을 5천여 자에 달하는 긴 문장으로 기록했다. 


무염 대사의 성장과 출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을 찬술 했는데 신라의 선종사史와 당시 신분제도 (골품제)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다. 


탑비에는 대사의 행적뿐 아니라 대사 사후에 진성여왕이 탑명塔銘을 지을 것을 최치원에게 하명하는 과정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888년 11월  신라 두 임금 (경문왕, 헌강왕)의 국사國師인 선禪 화상께서 목욕을 마치고 앉은 채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3일이 지났건만 자리에 단정히 앉은 그대로였고, 얼굴 모습도 살아 계신 듯하다 
(888년은 진성여왕이 등극한 다음 해다.)


여왕이 크게 슬퍼하며 글로 조문하고 곡식으로 부의했다. 시호와 탑호를 내렸다. 그리고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을 불렀다. '부왕인 경문왕이 너를 유학 보내주었고 헌강왕은 국사國士로 예우했으니, 무염대사의 탑명( 탑에 새긴 글)을 지어 보답하라.'
(경문왕은 진성여왕의 아버지, 헌강왕은 오빠)


그러자 최치원이 사양한다. '글로서 은덕에 보답하라시니 천행이지만 제 유한하고 하찮은 재주로 무한하고 커다란 행적을 기록하려 함은 허약한 수레에 무거운 짐을 싣고 짧은 두레박으로 깊은 우물물을 긷고자 하는 격입니다.'


여왕이 우긴다. '사양하기를 좋아함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좋기는 하다마는, 그러면 빈공과 급제가 무슨 소용인가. 그대는 힘쓸지어다.'
(빈공과 : 당나라 때 실시한 외국인 전용 과거. 최치원이 여기서 장원급제했다.)


최치원이 마음을 굳힌다 : '마음을 공부하는 사람은 덕을 세우고,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은 말을 세우니, 저 덕은 말에 의지해야 칭송될 수 있고, 이 말은 덕에 의지해야 영원할 수 있다. 칭송될 수 있으면 마음을 멀리 나중 사람들에게까지 보일 수 있으며, 영원할 수 있으면 문장 또한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니, 또다시 어찌 한사코 사양만 하리오.'


성주사지에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 화상 탑비는 사산비명四山碑銘 (보령, 하동, 경주, 문경 )중의 하나이며, 글씨는 최인연이 썼다. 최치원의 문장과 완벽한 보존 상태, 뛰어난 조각술로 우리나라 고승 탑비 가운데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보령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남포오석藍浦烏石을 사용했다.







보령의 남포 월전리에도 최치원崔致遠의 자취가 있다. 


보리 섬(맥도)의 서쪽에 8개의 병풍바위가 있다. 최치원이 신라 말 혼란기에 세상을 비관하고 전국을 유랑할 때 보리 섬과 성주사를 왕래하면서 이곳 보리 섬의 바위에 시문을 새겼다고 하는데 마모가 심하여 지금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다.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장원 급제한 뒤 관직생활을 하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등 명문名文을 지어서 이름을 떨쳤다. 신라로 귀국한 후 관직에 진출해서 신라 말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보리 섬은 아담하고 운치 있는 섬이었으나  1995년 남포 방조제가 건설된 후에 육지가 되었다. 


남포 방조제

고려 현종顯宗 14년(1023년) 최치원崔致遠에게 문창후라는 시호諡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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