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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22. 2020

경로 취소 안되는 경영자

한번 더하면 잘할 것 같은 경영

내비게이션이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회사 차에 달려있는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목적지를 중도에 취소하는 기능이 없었다. 목적지를 한번 잘 못 설정하면  바보처럼 거기까지 가야지만 길 안내를 멈췄다. 내가 기계 조작을 잘 못해서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그 회사 다니는 아는 후배한테 얘기했더니 차를 가지고 한 번 들르란다. 이미 지네들은 알고 있는 버그였다.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한 번 작정하면 좀처럼 바꾸지 않는 경영자가 있다. 뭐가 되든지 끝까지 가봐야 직성이 풀린다. 불굴의 투지, 우직한 소신 등의 찬사가 따라붙지만 그건 쌍팔년도 (단기 4288년=1955년 ) 기준이다. 


회사에서 추진하는 주요 사업이나 과제는 실무자가 기안하고 경영자 또는 전결권자가 최종 승인해서 빛을 보는 게 보통의 수순이다. 하지만 거꾸로 위에서 내려온 구상안에다 실무 부서에서 살을 붙여서 착수하는 건들도 꽤 있다. 이런 '하명' 사업들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경영자는 자신이 직접 착안해서 시작한 일은 각별하게 챙긴다(=들볶는다). 마치 사장이 자기 아이를 회사에 데려와서 직원 시켜 돌보는 격이다. 더군다나 내부에서 반대가 많았던 건에 대해서는 (중간에 흐지부지될까 봐 그런지) 진행사항을 매주 보고하라고 다그친다. 별로 중요하지 않더라도 경영자가 애착을 가지고 덤비는 사안은 별도 팀까지 만들어 특별 관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게 다 비용이다.


무슨 일이나 시작이 중요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적기에 과감하게 접는 결단은 더 중요하다. 그런데 사령관 '이름표'가 붙은 프로젝트는 상황이 어려워져도 중간에 그만두기가 어렵다. 아니 두렵다. 눈치 없이 굴다가는 '존엄'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아 '반동'으로 찍힌다. 그러는 동안 비용은 계속 올라가고, 나중엔 본전 생각이 나서 중단하지도 못하는 매몰비용 오류 ,  '못 먹어도 고' 단계로 들어간다. 막다른 골목인 줄 알면서도 들어갔다 후진해 나오면서 길가에 주차해 놓은 다른 차까지 박으면서 손실은 배로 커진다. 





대개 이런 배경에는, 나는 '항상' 옳다는 경영자의 신념이 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아집我執이다. 이름이 좀 알려진 명품 CEO들일수록 더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름값을 한다지만 사람은 공산품이 아니어서 성능에 기복이 심하다. 명사名士 경영자들은 이미지 관리에 예민하다. 그래서 자기 이름이 걸린 프로젝트는 도중에 말썽이 생겨도 화만 내고 좀처럼 원안에 손을 대려 하지 않는다. 실패하는 경우 단위가 커서 또 다른 '명품'을 투입해서 '설거지'를 시키는 수도 있다. 


나는 내 생각과 말에 책임을 진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내 생각', '내 말' 들이 동의어는 아니다. '나'는 옳아도 '내 생각'은 잘못될 수 있다. 경영자가 앞장서서 추진한 일이 시기적, 공간적 제약으로 잘 안 돌아간다고 해서 그 일을 지시한 사람이 책임질 일이 아니다. 지시한 내용이 잘 못된 거지, 지시한 이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얘기다.  (죄는 미워도 죄인을 미워하지 말라는...) 다만 늦기 전에 그 지시를 수정하거나 취소하면 된다. '자기는 '항상' 옳고 그래서 자기 생각도 언제나 옳다'라고 믿는 딱한 경영자는 자기 생각의 오류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고 밀고 나간다. 거기다 대고 이번 일은 좀 잘 못 짚으신 것 같다고 거들어서 사장을 노엽게 할 만큼 담대한 부하는 많지 않다. '항상恒常'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성현은 예로부터 고정관념에 대해 조심하라고 경계했다. 항상 항恒은 '한결같은', '계속', '영구' 따위의 개념인데 주역의 32번째 뇌풍항 雷風恒괘에서 그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항恒 괘는 움직임을 상징하는 우레 뇌雷와 공손함을 상징하는 바람 풍風 두 개의 소 괘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는, '우레와 바람이 서로 더불며, 공손하고 동動하며, 강 剛과 유柔가 모두 응함이 항恒이니'라고 설명했다. 즉 조직에서 힘이 센剛 상사와 부드러운柔 부하가, 우레와  바람처럼 서로 맞장구쳐야 오래간다는 말로서 경영자가 새길 만한 부분이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게 '항상'이고, 그래야지 오래간다는 파격적인 교훈이다. 


故恒 非一定之謂也 一定則不能恒矣 唯隨時變易 乃常道也   항은 일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일정하면 항상 하지 못한다. 오직 때에 따라 변이變易함이 바로 항상 하는 道이다. 
정이천程伊川이 해석한 항恒의 정의


그러고 보니 장수 기업은 환경에 적응하는 변신 능력이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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