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개인의 선한 야성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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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서 석탄과 장작을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주인공이 어느 날 우연히 그 지역 수녀원의 어두운 비밀을 알게 된다. 자신과 가족의 안정적인 삶을 던지고 고통받는 소녀들을 돕기 위해 선한 야성을 드러낸다.
반전도 자극도 없는, '사소'해 보이는 짧은 소설이지만 인간의 본성과 사회 문제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돋보인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고 토론한 내용을 요약한다.
https://maps.app.goo.gl/yeUjrfuH5NUp36xx6
1985년 12월,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 로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는 12월 22일 일요일 아침부터 24일 화요일 밤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우연히 올해 2024 년 달력과 요일이 같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의 영향으로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존재했으며, 일상생활에도 종교적 영향이 크게 반영되었다. 텔레비전에서 삼종기도(가톨릭교회나 성공회에서 하루 3번 성당 종을 칠 때 바치는 기도)를 방송할 정도다.
1980년대 아일랜드 여성들은 교육, 취업, 정치 참여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남성보다 현저히 불리한 조건 속에서 살아갔다.
높은 실업률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일자리를 찾아 영국과 미국으로 이민이 급증하면서 많은 인구가 유출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소상공인 빌 펄롱이 성찰과 행동을 통해 점차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주인공의 나침반처럼 흔들리는 윤리적 책임감, 심리적 강박, 현실적 불안감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몰입감 넘치는 작품을 완성했다. 비장한 결심 같은 건 없고 갈등과 행동만 있다.
11월
[복지부동] [가족형] [안전제일] 지역의 주류 사회와 원만하게 지내면서 오직 다섯 딸을 잘 키우는 게 인생의 목표인 주인공 빌 펄롱.
혹독한 시기였지만 그럴수록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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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어느 날
[외면] 우연히 수녀원에서 소녀들이 학대받는 현장을 목도한다. 그중 한 소녀의 구조 요청을 무시한다.
아저씨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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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 떨지 마] 집에 와서 수녀원에서 있었던 얘기를 아내 아일린에게 얘기했다가 핀잔만 듣는다.
아일린 :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리 딸들은 건강하게 잘 크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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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일요일 새벽
[갈등] 창고에 갇힌 소녀 발견
내면 한편에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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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유] 원장 수녀가 주인공의 딸들(=인질)을 거론함.
수녀: 다들 곧 때가 되면 여기 학교에 들어오겠지요, 요즘은 애들이 너무 많아서 모든 애들이 다 갈 곳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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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2일 일요일 오전 미사 / 밤
[자책, 성체 회피 ] 수녀원에서 덥석 받은 촌지와 소녀가 마음에 걸림.
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내버려 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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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화요일 아침
[고뇌]
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이 이렇게 일하러 나가고 싶지 않았던 적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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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 [선물 경제 : 즉각적인 또는 미래의 보상에 대한 명시적인 합의 없이 제공하는 교환 시스템] 주인공이 어릴 적 윌슨 부인과 네드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낌.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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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화요일 점심
[압박] 망년회 회식하는 식당에서,
식당 주인 : 그 수녀들이 안 껴있는 데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곳하고 세인트마가렛 학교 사이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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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 화요일 밤
[행동] '자기 자신을 만나러 가는 듯한 기분'으로 성탄 전야에 수녀원으로 향한다. 평소 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하던 주인공이 '억지로 빗장을 당겨' 문을 열고 소녀를 구출해서 집으로 향한다.
[주인공의 신념] '최악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사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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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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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인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당한 현실을 외면하고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인가? 개인과 사회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억압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을 물었다.
미국과 유엔은 사람을 평가하는 최고의 가치를 ‘Integrity’로 정의한다. 그 뜻은, '누가 보든 안 보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2. 역사는 엘리트들이 독점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민초들도 다양한 참여를 통해 공동체의 건전한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있다. '위풍당당한' 수녀원의 '사소한' 소녀에 대한 '사소한' 개인의 사랑과 용기가 큰 변화를 이끌어 낸다.
3. 가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주인공 빌 펄롱은 수녀원 소녀를 구출하는 행동이 아내와 딸들의 안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펄롱은 혈연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넓은 시각으로 가족을 정의하며, 따뜻한 가정환경이 절실한 소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4. 자신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주인공과 가족의 앞날에 고난이 예상되지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평생 고통을 지고 살아야 할 것이므로 후회는 없고 마음이 편안하다. 그런 관점에서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5. 나쁜 일들이 누적되고 일상화되면 그 안에서 윤리 의식이 마비된다. 소설 속 뉴 로스 마을 사람들은 막달레나 수녀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알고 있지만 개입하지 않고 방관한다. 사회 구성원들이 불의를 목격하면서도 개입하지 않는 무관심과 공동의 책임 회피 문제를 제시했다.
6. 주인공이 성당 미사에 참례해서 성체(가톨릭에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 성사를 건너뛴 다음, 수녀원에서 소녀를 구출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성체를 영했다.
7. 이 소설의 주제는 종교 시설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막달레나 수녀원은 작품 속에서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상징하는 '소품' 역할을 할 뿐, 외부로부터의 감시와 비판을 차단하며 서민 위에 군림하는 어느 기관이나 개인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8. '궁색해도 의로움을 잃지 않고, 시류에 영합하는 것을 비루하게 여기는' 우리 조상들의 선비정신이 주인공의 가치관과 겹친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이지만 맥락사회, 남존여비, 머슴, 성직자(수도자)의 권위 등이 크게 낯설지 않다. 아일랜드가 우리처럼 오랫동안 핍박받은 민족이라 그런지 아니면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런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