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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04. 2023

웃는 걸로 퉁 칠만큼 삶이 간단치가 않다.

독서록 : 사랑으로 / 에이미 블룸

yes 24


사사랑으로 / 에이미 블룸

독서록 : 사랑을 담아 / 에이미 블룸 지음, 신혜빈 옮김



미국의 60 대 건강한 남자 Brian Ameche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즉시 죽음을 결심한다.  그는  6개월 후 스위스로 건너가 '디그니타스 DIGNITAS'라는 기관의 도움을 받아 자살했다. 그의 아내인 소설가 Amy Bloom이 이 과정을 기록해서 책으로 냈다. 


스위스의 비영리 단체 디그니타스는 말기 질병이나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자살을 합법(스위스 법) 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다른 말로 조력 자살이라고 부른다. 


예일대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주인공 Brian은  알츠하이머로 인한 자아의 종식 (end fo self)이 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생명을 종식 (end of life) 시키기로 결정했고 배우자인 Amy Bloom은 그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멕시코의 혁명가가 말했다는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두 발로 서서 죽겠다 ( rather die on my feet than live on my knees)' 라는 각오는 책에서 품위 있게 죽겠다는 주인공 Brian의 의지를 은유할 때도 인용된다. 


이 책이 2022년 미국 최고의 논픽션으로 꼽힌 데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신파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2007 년 재혼한 부부가 겪은 상실의 이야기에 대해 워싱턴 포스트는 사랑의 힘으로 용기있는 이별을 선택했다고 평했고, 영국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배우자를 깊이 사랑하고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어떨지 고민하며 걱정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아름다운 책이라고 극찬했다. 


나는 말한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지상에서 유일한 시간이라는 이유로 혹은 신이 인간에게 할당해 준 거라면 뭐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해서 혹은 사는 동안 우릴 괴롭히는 질병의 치료법이나 치료약이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당신이 장수를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당신은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책 중에서 


한편 이 책은 각국에서 아직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는 조력 자살 제도에 대한 정보적 가치도 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 몇몇 주에도 존엄사법 ( Death with Dignity Act )이 있지만 6개월 이상 생명부지가 불가한 환자에게만 허용하는 등 제약이 많다. 따라서 주인공과 배우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의학적 판단보다는 환자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자살 결정에 중점을 두는 스위스의 디그니타스를 선택했다. 


기관의 사명을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게 죽는다'로 삼는 디그니타스는 조력하는 자살의 범주에 자아를 상실한 삶의 단축도 포함해 주었다. 그러나 디그니타스에서는 우울증 환자의 자살은 자유로운 의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는다.  


이 책은 Brian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주인공과 배우자가 겪는 곡절을 기술하는 데 적잖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남편의 조력 자살이 거부될까 초조해진 Amy가 '우울증 없음' 진단에 소극적인 전문가를 마구 비난하는 장면에서 좀 민망하긴 했지만, 품위 있게 죽고 싶다는 남편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고 싶은 독한 사랑의 발로라고 믿는다. 


부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Brian은 2020년 1월 말 스위스에서 자살에 '성공'한다. 2019년 8월 알츠하이머 진단받은 지 5개월 만이다. 




그것이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인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살을 죄악시하는 윤리의 근간이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역설적으로 병도 많아졌다.  노인들은 장수長壽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며 한탄한다.  완치 불가한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가 스스로 생명을 마감하는 권리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고 있다. 평화롭고 존엄한 죽음을 결정하는 권리가 기존 윤리에 우선한다는 정서다. 


이 책에서 '완치 불가한 질병'은 알츠하이머다.  육체적인 고통은 없지만 자아를 잃어 가는 환자가 스스로 생명을 단축하는 이야기다. 가족과의 추억을 잊어버리고 인지력이 파괴되고 오직 감각과 운동의 본능만 온전한 채 이어가는 삶은 의미가 없다고 단정한다.  


Brian은 알츠하이머가 진행됨에 따라 도래할 자아가 상실된 삶을 자발적으로 제거해 버렸다. 낯설고 추한 삶이 자아를 훼손하지 못하게  미리 손을 썼다.  아직 분별력이 있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가족이나 주위에 끼칠 심적인 스트레스와 육체적 부담의 원천을 차단한 이타적 선행으로 칭송받을 수도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도 주인공의 결정에 공감하면서 자기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닥치면 험한 꼴 보기 전에 스스로 정리했으면 좋겠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자아의 상실 (end of self) 이후 생물학적 죽음 (end of life) 까지의 삶은 정녕 가치가 없는 생명의 연장이고, 그래서 가능하면 그 부분을 끊어버리는 게 용기 있는 행동일까? '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혹시  그러한 행동이, 


1) 생애를 통해 구축한 현재의 자아(=체면)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기억력과 인지력으로만 자아를 정의하는 것은 인간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일 수 있다. 치매 환자들도 여전히 순간적인 즐거움, 편안함, 불편함 등의 경험을 통해 그들의 자아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알츠하이머로 인해 튀어나올 원하지 않는 자아를 부정하고 지레 자기를 제거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을까? 이런 이기적 죽음에 '존엄'이라는 형용사가 가당한가? 


그게 아니고,


2) 뇌의 기능이 부실해지면 나머지 몸뚱이도 '살처분'하는 게 온당하다는 입장이라면, 


뇌에 장애나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다는 얘기일까?  


인지력이나 기억력이 없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도 여전히 소중하며, 돌봄과 관심을 통해 그들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Brian처럼 자아가 강한 사람도 만일 가족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극단적 결심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을 수 있다. 


이 땅의 Amy 들은 동일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독립운동이라도 하듯 남편의 죽을 권리를 쟁취해서 자살에 '조력'했을까?




선진국은 이미 소극적 안락사인 존엄사를 인정하는 추세에 있으며 일부에선 인위적 생명 단축 행위인 안락사도 부분적으로 묵인하고 합법화하고 있다.


우리 국민의 76%가 존엄사 내지 의사 조력 자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헌법이 보장하는 자기 결정권에 죽음을 포함시키기로 우리 사회가 합의한다면 자살 방조 금지 같은 형법도 대충 정리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단축하는 ‘조력 존엄사’가 입법화된다면 혹시 말초적인 충동에 의한 자살까지 조력 자살로 포장되어 생명 경시 풍조가 확산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미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국가에서 1,2 위를 다투고 있다.


자살을 개인이 감당할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라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주장을 기억한다. 




어느 시인처럼 '웃지요' 하고 퉁 칠만큼 삶의 이유가 그리 간단치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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