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책 :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rs / Isabella Bird Bishop 지음, 신복룡 역주
책은 19세기말,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조선 땅을 여행하며 남긴 생생한 기행문이다.
저자는 서구 열강과 일본,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각축전을 벌이던 1894년에서 1897년 사이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방문해서 11개월을 머물렀다. 비록 서양인의 시각이지만 당시 조선의 사회·문화적 실상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그리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길이나 무게등을 수치로 정밀하게 기록한 점이 돋보인다.
130여 년이 흐른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비숍의 기록에 담긴 1890년대 조선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한편 놀랍게도 '여전함'과 연속성 또한 품고 있다. 저자가 책에서 제기한 도시화, 교육 체계, 언어 습관 등 조선의 문제적 요소들이 형태만 달리 한 채 우리 시대에 고질적 병폐로 잔존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68 페이지
어떤 의미에서 서울은 곧 조선이다....... 국가생활이 무엇이든 그것은 수도에만 존재한다. 서울은 정부의 주소지일 뿐 아니라 공식적 생활이나 모든 공직의 임용 그리고 채용의 유일한 통로인 문예시험 (과거)의 중심지이다.....상업의 전형이라고 해야 행상 정도이지만 그나마도 서울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관리들은 서울에 별저를 가지고 있으며 일 년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들의 업무를 속관에게 맡기고 서울에 와서 지낸다.
대한민국 ㅣ 2025 년
여전히,
서울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며, 전국의 인재와 자본이 서울로 집중된다. 수도권으로 인구가 몰리는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 후에도 간부들의 가족은 여전히 서울에 남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86 페이지
조그마한 마을이 아닌 부락에는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학교가 있다. 문중이 모여 선생을 고용하는데 학생들은 대개 선비의 집안이다. 인문학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한학은 조선사람들의 꿈인 관리가 되는 시금석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370 페이지
교육적 수련은 조선사람들의 야망찬 목표인 공직을 얻기 위한 단계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교육은 사고력을 발전시키거나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도록 하지는 못했다. 어려운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과 그것을 통해서 그에게 가져다주는 지식은 그 자체가 바람직한 정신적 훈련이었으며 공자와 맹자의 윤리적 가르침으로서는 비록 미흡했지만 가치 있고 진실한 것을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유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편협, 관례, 자부심, 거드름, 노동을 경멸하는 잘못된 위선, 이기적 개인주의, 너그러운 공공 정신과 사회적 신뢰의 파괴, 2000년의 관습과 전통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노예근성, 편협한 지식, 얕은 도덕심, 그리고 조선 교육 체제의 산물로 나타난 여성을 비하하는 풍조는 조선의 교육제도가 낳은 산물로 보인다
대한민국 ㅣ 2025 년
여전히,
조선 시대의 서원처럼, 특정 계층의 아이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고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사교육이 성행한다. 조선시대에 한문 경전을 외워서 입신양명을 이루려 했듯이, 오늘날도 영어와 수학 등 특정 과목이 중심이 되어 창의적인 배움보다는 입시 위주의 주입식 훈련이 교육을 지배하고 있다.
명문대 졸업장, 그리고 나아가 전문직 자격 면허가 인생의 성공을 좌우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조선시대 과거 제도의 그림자를 닮아 있다. 현대 한국에서도 학벌 중심의 사회 구조가 견고하며, 실용적 기술보다는 '화려한 스펙'을 우선시하는 가치관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31 페이지
조선의 언어는 혼합되어 있다. 식자층은 대화에서 가능한 한 중국어를 많이 사용하며 보고서의 모든 문자는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천년 전의 중국어 고어의 형태여서 중국에서 현재 사용하는 중국어와는 발음이 완전히 다르다. 조선의 글자인 언문은 한문 교육을 고집하는 지식층으로부터 무시되고 있다. 조선사람들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된다.
대한민국 ㅣ 2025 년
여전히,
외국어는 식자층의 상징이다. 전문가들은 자신의 지식을 외국어로 포장해야만 권위가 생긴다고 믿고 있다. 다만 한문의 자리에 이제는 영어가 들어앉았을 뿐이다. 외국어를 섞어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지식과 교양 수준을 뽐내는 지적 허영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간 앓고 있는 불치의 유전 질환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문화적 정체성이 혼란과 갈등을 겪으면서, 서양 문화는 언제나 우월하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잠재하고 있다. 뭐가 됐든 기능이나 용도가 현대화되면 영어식으로 개명하는 무조건 반사가 일어난다. 닭이 '치킨'으로, 전화기가 '폰'으로, 검은색이 '블랙'으로 둔갑한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106 페이지
많은 수의 비특권계층 사람들이 무거운 조세를 부담하며 양반들에게 억압당하고 있으며 양반은 그들의 노동을 대가 없이 이용함은 물론 도조라는 명목으로 무자비하게 수탈해 가는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174 페이지
동학은 조선에서 관료들이 자신의 목적들을 위해 왕의 귀와 눈을 멀게 하고 백성들에게 미치는 잘못된 모든 소식과 보고들을 왕에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는 사실들이었다. 조정 대신과 방백 수령들은 나라의 복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채 오직 자신의 재산을 모으는데만 주력했으나 그들의 탐욕을 제어할 길이 없었다.
대한민국 ㅣ 2025 년
여전히,
뿌리 깊은 고위층의 부패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공공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은 18세기 조선의 관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한국에서도 경제적 불평등 또한 심각한 문제다. 세습 재벌가와 상류 계층의 특권적 지위가 비판받고 있으며, 서민들은 그들의 노동으로 돌아오는 보상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220 페이지
조선사람 이주민들은 중국인을 능가했다.... 당국자의 주장에 의하면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중국인들과의 야채시장에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이 도시의 상권을 장악했다고 했다.
229 페이지
조선에서 나는 그들이 열등민족이었고 삶의 희망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으나 프리모르스크에서 나는 나의 의견을 수정해야 할 이유들을 발견했다. 그들 자신을 부유한 농민층으로 끌어올리고...근면하고 좋은 품행을 가진 우수한 성격... 대개 기근으로부터 피난 온 굶주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재산과 일반적인 태도는 조선에 있는 그들의 동포들이 정직한 행정과 수입에 대한 정당한 방어가 있다면 천천히 인간으로 발전해갈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나에게 안겨 주었다.
328 페이지
여행자들은 조선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으나 러시아와 만주에 이주한 조선사람들의 활력과 인내를 보고, 그들이 집을 치장하거나 그들의 번영한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나는 조선사람들의 게으름을 기질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ㅣ 2025 년
게으르고 더럽다는 비난을 받았던 조선시대 백성이 타국으로 이주해서 자기 주도적이고 근면한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조선시대 지배 계층의 억압이 그들의 가능성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인들이 북미, 유럽 등으로 이민 가서 성공적인 삶을 일구는 사례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경쟁과 차별로 인해 제약을 받던 이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기회와 자유를 부여받았을 때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큰 성과를 이루어냈다. 시대적,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공동체적 조건 반사와 한 나라의 국민성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96 페이지
돌탑 근처에는 술 취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과음하는 습관이 드러나지 않는 날은 없었다. 사공들은 과음으로 저녁 휴식을 즐겼다..... 한강 여행과 그 후의 여행을 통해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과음은 조선의 독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것이 불명예가 아니다. 어떤 남자가 이성을 잃을 때까지 막걸리를 마신다 해도 아무도 그를 야만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체가 높은 사람들조차도 잔치 끝에는 술에 취해 마루에 구르기도 하는데 다시 제정신이 되어서는 음식을 아주 배불리 먹고 사회적 지위를 잃지 않고...
대한민국 ㅣ 2025 년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과음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윤활유로 읽히는 음주의 낙원이다. 조선시대 막걸리에 소주와 맥주가 추가되었을 뿐 취해 쓰러질 때까지 '원 샷'을 외치는 모습에 익숙하다. 법조문의 '주취 감경' 조항은 술을 마시는 행동을 무책임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한국에서 음주로 인한 사회 경제적 비용이 10조 원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다. 음주 원인 질병 치료비, 음주운전 사고, 주취 폭력 범죄로 인한 비용, 생산성 손실, 주벽으로 인한 가정해체 따위가 그 내역이다.
조선시대 ㅣ 1894 년
152 페이지
내가 여러 차례 관찰한 바에 의하면 먹는 훈련은 어릴 적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한 엄마가 그의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인다. 그리고 많이 먹은 후에도 더 먹을 수 없으면 띠를 둘러 등에 업은 채 다시 더 먹인 다음 평평한 숟갈로 어린이의 배를 두드려 보고 다시 먹일 때도 있다.....
대한민국 ㅣ 2025 년
한국에서 부모 자식의 관계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 일종의 숙명적 인연이다. 특히 어머니와 자식 간의 유대는 깊고도 절대적이다. 배를 두드려 공간을 확보한 뒤 다시 한 숟갈을 더 떠먹이는 행위는 단순한 영양 공급을 넘어 자식을 향한 무조건적이고도 집착에 가까운 보살핌의 표출이다.
이 장면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적 자식 사랑의 본질을 보여준다.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결정할 여지를 주기보다는 '네가 배고픈지 아닌지는 내가 더 잘 안다'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내 아이가 인생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영어 조기교육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의대반, 과학 캠프까지 필수다'라는 요즘 학부모의 강박으로 이어진다.
다 큰 자식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묻는 이 시대 부모의 모습에서, 130여 년 전 비숍이 포착한 광경이 그대로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