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책이름 : 커피, 이토록 역사적인 음료
지은이 : 진용선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당일치기 시험공부할 때 잠에 대항하는 각성의 목적으로 커피를 시작했다. 미련하게도 인스턴트 커피를 가루 약처럼 입에 털어 넣기도 했다. 그 각성 부副작용은 지금도 유효해서 나는 커피를 오전에 몰아 마신다. 이 책의 뒤표지에 저자가 던진 질문 '아울러 독자들에게도 묻는다. 당신에게 커피란 무엇입니까'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은 커피와 가까워졌다. 을미사변 당시 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에 울분과 분노가 가시지 않은 고종에게 초대 조선 주재 베베르 공사의 처형이자 독일계 프랑스인인 앙투아네트 손탁 여사는 매일 커피를 대접했다.
29-31 페이지
책 제목, '커피, 이토록 역사적인 음료'를 오독하면 그 흔한 '커피의 역사' 정도로 여길 수도 있으나, 이 책에서 커피는 '주어'가 아니라 '서술어'다. 저자는 '커피'를 프리즘으로 사용하여 우리 근대사를 굴절시키고, 드러내고, 해석했다. 대궐에서 시작해서, 외교 구락부, 호텔, 다방... 윤락업소까지 커피가 등장하는 '장소'는 그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
커피가 망국, 일제강점기, 해방 후 군정시대, 6.25 동란, 군사정권 등 우리나라 근대사의 변곡점에서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동시에 품어낸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기록물 관리 전문가(archivist) 답게 각 시대적 현상을 메타데이터 (기록에 대한 정보)가 붙은 자료와 이미지를 뒷받침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했다.
사실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아이스커피에서 100년의 시간을 이어온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찬물을 지극히도 좋아한 우리의 오래된 문화의 결과물이다.
148 페이지
이제까지 우리가 생뚱맞다고들 (=우연이라고) 치부해 온 우리나라의 '믹스커피', '세계적인 일 인당 커피 소비량', '아이스 아메리카노' 등등 문화 현상들이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음을 저자는 승정원일기까지 동원하며 설득한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적어도 당분간은 여느 때와 다르게 묵직하게 느껴질 것 같다. 고종의 고민, 모던 보이들의 설렘, 다방 문인들의 열정,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일상까지 이어진 긴 이야기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일 것이다.
저자 진용선이 보여주었듯이 우리 주변의 가장 평범한 것들 속에도 역사가 숨어있다.
중학교 때 춘천 공지천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처음 맛본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인연으로 시작해서, '이토록' 특별하게 우리 근대사를 재해석해낸 저자가 다음에는 또 어떤 일상의 소재를 가지고 역사의 이면을 들춰낼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