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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감자 심기와 골프 연습의 공통점

귀촌 얘기

by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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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후 처음 맞이하는 봄. 부지런한 농부의 발자국 소리에 대지가 깨어나는 4월이다.


농사는 아직 초보이지만 당장 뒤란 텃밭을 놀리자니 이웃에 눈치도 보이고 해서 뭔가 심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꼴에 '상투적인 상추' 말고 뭐 좀 진취적인 거 없을까 하고 미적대던 참에, 건너편 집 ㄱ 님이 씨감자 가져갈래냐고 묻는다.


시골 마을에서는 주고받는 게 일상이다. 음식이든 채소든 불쑥 찾아와 디밀거나 택배처럼 문 앞에 슬쩍 놓고 가기도 한다. 마을 초년생은 누가 놓고 갔는지 몰라 멀뚱 거리지만 동네 사람들은 쉽사리 출처를 안다.


농부는 어딜 가든 논밭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무얼 심었는지, 어떻게 가꾸었는지 살핀다. 업계 전문가답게 '보리 거둘 때가 됐는데 저러다 비 맞추겠구만', ' 고추는 줄 안 묶어주나' 등등 자기 일처럼 걱정하면서 앓는 소리를 한다. 하물며 이웃집 농사는 매일 오가며 눈여겨보는 터라 빠삭하게 꿰고 있다. 그러니 문 앞에 놓인 고구마 한 광주리, 가을 무 한 단을 보면 뉘 집에서 왔는지 대번에 직감한다.


그렇지만 씨감자를 주기 전에 먼저 의사를 타진하는 이유는 씨감자가 소비재가 아니라 생산재이기 때문이리라. 노동을 유발(권유) 하는 선물이니 일차 동의를 구하는 예의다. ㄱ 님의 광에 따라 들어가서 씨감자를 한 빠케스 담으며 감자 자르는 요령도 배웠다. 나머지는 인터넷을 믿는다. 하지만 ㄱ님의 교육은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씨감자를 오래 놔둘 수도 없고, ㄱ님 또한 나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므로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인터넷이 시키는 대로 밭에 이랑 넓이를 90 센티로 벌려서 고랑을 파고 두둑 세 줄을 쌓아 올렸다. 혹시 몰라서 옆집 ㄴ 님 밭에 가서 줄자로 이랑의 폭을 재보니 정확히 90 센티다. 마당에서 씨감자를 고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 ㄱ 님이 들어선다. 씨감자를 마저 손질하고 가보니 어느새 ㄱ 님이 밭에 들어가 삽을 들고 '나의' 두둑 1번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게 아닌가. 너무 넓다는 거다. 와중에 두둑은 네 개로 늘어났다


벙쪄 있는데 ㄱ 님은 내가 준비해 온 씨감자 조각들을 숙달된 동작으로 고랑에 일렬로 깔더니 양옆 두둑을 뭉개서 감자들을 덮는 시범을 보인다. '고랑이 아니라 두둑에 심는 거 아닌가요?' 물어봐도 막무가내다. 그러다가, 각자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하면 된다고 한발 물러서다니 ㄱ 님은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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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평생 농사만 지은 전문가의 권위에 눌려 토도 못 달고, 나는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줄도 고랑에다 씨감자를 깔아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집의 ㄴ님이 등장하더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아니 생각을 좀 해보세요, 흙이 부드러운 두둑에 심는 것과 고랑에 심는 것 중 어느 쪽이 감자가 뿌리를 잘 내릴까요?' 하면서 ㄴ 님이 나의 상식적 수준을 자극한다. 내가 '글쎄 내 생각도 두둑에... 그런데 저기 ㄱ 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서 더듬는데, ㄴ 님은 '그러면 ㄱ 님 말이 맞겠지요.' 하면서도 얼굴엔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나는 고민 끝에 절충안(=우유부단)으로 나머지 두 줄은 두둑에 심기로 했다. 혹시 ㄱ 님이 건너 집에서 보고 있을까 봐 서둘러 심고 흙을 얼른 덮어버렸다.


오래전 유럽 근무 시절이 떠올랐다. 골프 드라이빙 레인지에 나가 7번 아이언을 연습하고 있는데, 옆 칸에 있던 ㄱ 그룹 주재원이 친절하게 자세를 교정해 준다. 잠시 후 ㄴ항공 후배가 지나가다 보고 '형님 이러면 안 늘어요'라고 핀잔을 주며 내 등 뒤로 다가와 어깨를 붙잡고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자세를 틀어놓는다. 옆에 ㄱ 그룹은 못 들은 척 다른 데 보고 있고. 난감한 상황이 수십 년 뒤 감자 심으면서 재현되고 있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받아들이는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다. ㄱ과 ㄴ 모두 자신만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방식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농사든 골프든 '정답'보다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는 법인데 초보인 내가 그 지혜를 온전히 소화하지 못해 마치 방식들이 충돌하는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SE-1d0b81a0-9a21-4f1a-b25c-382f8e706196.jpg?type=w1 © MeshCube, 출처


내 감자밭에 보여준 두 이웃의 관심은 오지랖도 호기심도 아닌 인심의 다른 표현이다. 농촌에서 인심은 이렇게 때로는 직설적이고 투박하게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 나도 내 방식으로 감자를 심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이웃의 조언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농촌 생활의 지혜를 조금씩 쌓아가는 수밖에.


고랑 심기 대 두둑 심기 농법에 따라 감자 소출이 어떻게 차이가 날지 벌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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