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면 ‘주니어 소믈리에’다. 복잡한 이론과 실기를 다루진 않지만, ‘주니어’라는 명칭 그대로 와인 초심자를 위해 기본을 다지고 흥미를 키울 수 있도록 설계된 입문 단계 프로그램이다.
소믈리에 sommelier : 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일컫는 불어.
뜻밖의 인연, 예밀 와이너리
영월군에서 주관하는 ‘와인 초급 강의’ 공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교육장이 김삿갓면에 있는 예밀2리 영농조합법인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또는 생산지)였다. 캠벨 종의 포도향이 매력적인 예밀 와인을 몇 번 주위에 선물한 적도 있고, 마을의 정겨운 분위기에 끌려 선뜻 수강 신청서를 냈다.
와인에 대한 은근한 반감
직장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옮겨 다니며 근무하는 동안 서양 전통 음식의 핵심에 속하는 와인과 접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아르바이트 월급 타면 가던 무교동 파라다이스 애플 와인까지 치면 나의 와인 '구력'도 햇수로는 꽤 되지만 내용은 건성이다. 밥상머리에서 와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에게 별로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 '그래봐야 술이 거기서 거기지, 뭐 유난을 떨까' 하는 은근한 반감이 있었다.
첫 수업의 깨달음
그동안 와인병의 레이블 읽는 요령을 알려 주는 친구가 몇 있었지만 관심이 없으니 유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Cabernet Sauvignon'이라고 적힌 레이블을 보면 일단 프랑스 외 지역 와인으로 단정 지었는데, 이게 얼마나 무지한 '만행'이었는지 수업 첫 시간에 깨닫게 되었다.
포도 품종이 와인의 향과 맛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기본 상식이다. 그중에서도 맛보다 향이 와인 감별의 첫 단계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와인의 본고장을 자부하는 프랑스 (이태리 사람들은 동의 안 하겠지만), 그중에서도 명성이 높은 보르도 Bordeaux 지방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이 바로 '카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이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와인 레이블에 포도 품종보다는 사용된 포도가 재배된 지역명을 주로 표기하는 관행 때문에 내가 멋대로 오판했던 것이다.
커리큘럼
약 한 달 반 동안 주 2회 예밀 와인 방문자 센터에서 진행된 초급 와인 소믈리에 과정은 와인 양조 이론부터, 와인과 음식, 구세계 와인 대 신세계 와인의 품종과 특징까지 촘촘했다. 와인의 세계는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의 '구세계'와 미국, 남미, 호주의 '신세계'로 나뉜다. 프랑스 와인의 산지와 생산자, 등급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프랑스 회사의 한국 법인을 십여 년 맡아 운영하면서도 '악착같이' 불어를 배우지 않았던 내가 이제 와서 프랑스 지명 스펠링을 익히느라 끙끙대는 아이러니에 혀를 찼다.
시음
사전 교육 안내에 수업 중 테이스팅(시음)이 있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한두 번 시범만 보여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시음은 과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강사는 매번 수업 시작 전에 오늘 사용할 잔의 숫자를 '선언'했다. 세계 각 지역의 와인을 서너 잔에 따라놓고 향미를 비교·평가하며 강의를 들었다. 포도 생산지, 품종 등 이론은 외우면 된다지만 실기는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 와인의 향을 잠깐씩 맡고 꽃, 과일, 채소, 미네랄, 향신료 냄새를 열 가지씩 식별해 내는 신공은 몇 번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월남 국숫집을 백 미터 전에 냄새로 알아차리는 나의 개코도 와인 향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철없던 시절 술을 마시고 교실에 들어간 적은 있어도 '당당하게' 술을 마시면서 강의를 듣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나중엔 술을 마시면서 시험까지 보게 된다. 물론 마시는 게 아니고 향과 맛을 조금씩 음미하는 수준이다. 강사도 원샷 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우리 세대의 대부분은 주종 불구하고 술을 알코올 섭취 수단으로만 여겼다. 맛이나 향 같은 거 따질 겨를 없이 들이키기 바빴다. 한국 사람이 유럽에 가서 위스키를 (잔으로 주는 게 감질난다고) 병으로 시키면 술집 사장에게 보고되고, '같은 걸로 한 병 더' 하면 지역 신문에 난다는 말이 있다.
열정
강의를 맡은 최정욱 와인 연구소장의 블로그 대문엔 '교육도 합니다. 생업이고 취미이고 재미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자기 일을 즐기는 이의 언어는 확실히 달랐다. 학생들이 미처 소화하기 힘들 정도의 풍부한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고 나서 미안한 듯 '이런 것까지는 굳이 몰라도 됩니다'라고 덧붙인다.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배려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 모든 것은 그 이의 풍부한 경험과 깊이 있는 지식에서 우러나오는 소중한 이야기들이었다.
예밀촌
예밀촌은 예미와 밀골 두 부락이 합쳐진 마을로 해발 1000 미터의 청정지역인 망경대산 안자락에 자리한 전형적인 강원도 산골마을이다. 석회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토양과 큰 일교차 그리고 풍부한 일조량이라는 이상적인 자연 여건이 조성된 영월 예밀촌에서는 대표 특산물로 폴리페놀 함량과 당도가 높은 캠벨얼리 종의 포도가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다. 이 포도로 만든 자체 브랜드 예밀 와인은 100% 포도만으로 유럽 와인 방식 그대로 양조된다. 특히 예밀 레드 드라이 와인은 2019년 조선비즈 대한민국 주류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품질과 맛을 인정받고 있다.
앞으로의 한 잔
과정은 필기시험과 포도의 생산연도, 지역, 품종 등을 판단하는 관능 평가를 치르고 끝났다. 입문 단계라 난도가 낮다고는 하지만 시험은 만만치 않다.
수강생 대부분이 지역 포도 농가나 와이너리 종사자들이어서, 전문가들 사이에 끼인 아마추어처럼 살짝 겸연쩍기도 했다. 훌륭한 강의를 열정적으로 진행해 준 최정욱 소믈리에와 따뜻하게 맞아준 예밀 와이너리 관계자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내 옆자리에 앉을 누구에게 직접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 보는 일이다.
한국 와인은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로 양조하므로 맥주, 막걸리, 소주 등과 비교할 때 오히려 재료의 국산화율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와인에 대한 편견과 낮은 인지도로 인해 그 숨겨진 매력과 가치가 수요 확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의Louis Hans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