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하면 잘할 것 같은 경영
하루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 법인 대표 P 씨와 점심을 먹었다. P 대표는 유럽 본사에서 파견 나온 주재원인데 한국 시장의 영업 방식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 사람은 한국에서 장사하려면 접대와 뇌물이 필수적인데, 자기네 유럽 본사는 도무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푸념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우리 회사는 그런 거 없이 영업하는데... 했더니, P는 옆에 앉아 있던 한국인 영업 책임자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 얼굴에 일순 단풍이 들었다. 당시 필자의 회사는 건설회사 등을 빈번하게 찾아가 제품을 소개하고 빌딩 공사에 써 달라고 영업(간청) 하고 다녔다. 갑 을 관계로 치면 우리는 을 중의 을에 속하지만, 갑 측에 대해 뇌물은 물론이고 술 접대도 안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업계에서도 필자 회사는 아예 그런 데로 쳐주어서 큰 차질은 없었지만, 일선에서 활동하는 동료들은 몇 배의 영업력이 필요했다.
우리나라의 부패 정도가 우리 국격(?)에 비해 매우 높은 건 사실이지만, 국내 주재 외국인 경영자들 간에 그 정도가 실제보다 더 부풀려져 있다. 한국에서 접대 없이 사업하는 건 불가능한 것처럼 주장하면서 우리나라의 사업 환경을 온통 쓰레기통으로 몰아붙인다. 거기엔 영업 실무자들이 걸핏하면 실패 책임을 경쟁사의 부정한 영업으로 핑계 대는 경향에도 원인이 있다. 언론에서는 외국인 사장이 폭탄주 마시며 재롱 피우는 걸 내보내면서, 마치 술이 한국의 대표 문화이고, 술타령 ( drinking strategy)을 안 하면 회사 안팎으로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과장한다.
'국민 권익위원회'의 영문 명칭엔 특이하게 앞에 반부패란 뜻의 'Anti-Corruption'이 붙어있다. 줄여서 'ACRC'라고 부른다. ACRC는 국내에 진출한 해외 다국적 기업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하여 한국 정부의 반 부패 노력을 홍보한다. 몇 번 가보았다. 거기 초청받은 기업들, 특히 다국적 제약 메이저들은 리베이트 등 부패한 영업 관행 때문에 어디 한국에서 사업해 먹겠냐고 빈정거리고, 장관급인 위원장은 우리도 열심히는 하고 있다고 (절절매며) 변명했다. 우리가 얼마나 부패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지 알아 달라는 것이다. 앉아 있자니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했다.
필자 회사도 투명한 영업만 고집하다가 자격 미달의 경쟁 업체에 밀려 골탕 먹은 적이 더러 있다. 원청사인 건설사와 우리 회사의 실무자들이, 갑 을이 아닌 파트너로서 수년간 신축 건물에 들어갈 장치를 공동 개발했다가 납품 직전에 물거품이 되는 일이 있다. 갑자기 '위'에서 특정 회사의 제품을 쓰라는 납득할 수 없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만 낭패가 아니라, 공사 일정이 지연되고 비용도 올라간다. 무엇보다 시공 품질의 하자가 불가피해서 나중에 빌딩의 입주자들까지 두고두고 불편을 겪을 게 뻔한 황당한 결정이다. 건설사의 실무자도 기가 막혀서 그 윗선에 '아니 되옵니다'하고 버텨 보지만, 그 윗선으로부터 도리어 '너 거기( 필자 회사) 서 돈 먹었냐'라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 좌절하고 그만 입을 다문다. 적반하장이다. 개 눈엔 똥 밖에 안 보인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돈 또는 권력 ( 또는 둘 다)이 치고 들어와서 하루아침에 공급사가 뒤집어진 경우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동시대 '윗선'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직원뿐 아니라 갑 측의 실무자마저도 보기가 민망했다. 실력이 아닌, 불결한 뒷거래에 의해 놓친 신축 빌딩들은 볼 때마다 불쾌한 기억이 되살아나곤 해서 지금도 그 앞으로 안 다닌다. 그리고 그 아픈 기억은 옹졸한 나의 저 깊은 하드디스크에 각인된 채 평생 간다. 그런데 그 '윗선'의 횡포가 안 통하는 갑도 있었다. 그 대기업 소속 건설사는 직속 임원이 실무자에게 설사 말도 안 되는 지시로 찍어 눌러도, 실무자가 '그럼 상무님이 나중에 책임지시겠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는 선진적이고 강직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 영업 실무자는 그 회사에 가면 밥을 얻어먹고 왔다. 잘 되는 기업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