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과 사회적 기업
조선시대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엔 '흉년에 땅을 늘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이 있었다고 한다. 대대로 사회에 대한 책임 ( 노블레스 오블리주 )을 실천한 이 만석꾼 집안은 12대에 걸쳐 400년간이나 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국가 경제발전의 주역임에도 불구하고 욕을 먹는 주된 이유는, 인간적 본능이 남에게 베풀 기회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더 벌어서, 더 쌓아놓고, 더 물려주고 싶은 인간의 욕심에서 탈법의 경계선을 넘나들기 바쁘다. 집념과 야망으로 사업을 일구어 국가 경제 발전에 공헌한 기업가는 존경받아야 한다. 그 대가로 얻은 부와 명성도 부러울망정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 재산과 경영권을 부풀려서 물려주기 위해 기획하는 각종 '창의적인' 반칙은 탐욕이다. 기업의 이익을 교묘히 이전시켜 상속 비용을 조달하는 속임수는 소모적이며, 기업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시도하는 편법과도 차원이 다르다. 주주에 대한 배신이며 기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자해 행위다. 우리나라의 높은 상속세율로도 변명이 안되고, 재벌의 국가 경제에 대한 공헌과도 상쇄될 수 없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불거진 총수 자식들 간의 쌈박질을 보는 국민들은 기가 막힌다. 공들이지 않는 재물을 두고 다투는 '왕자의 난'은, 동물의 왕국에서 먹이를 차지하려 물고 뜯는 맹수 새끼들보다 더 볼썽사납다. 짐승보다 못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고 그런 자식들을 위해 별별 궁리를 하며 애쓰는 아버지 재벌이 안됐다.
잊을만하면 고개를 쳐드는 비현실적인 재벌 해체 주장이 현실이 되기 전에, 그리고 재벌 기업이 자유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빌미로 더 이상 악용되지 않게, 총수 일가는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한가'를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좋겠다.
재벌 2세, 3세들이 회사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는 '경영 수업 놀이'는 이제 내려놓으세요. 골치 아프게 계열사들을 서로 꼬리 물려 투자시키고, 위장 계열사 꾸미는 장난도 쪼잔합니다. 개운하게 털어버린 다음, 총수 식구들은 품격에 걸맞게 사회문제에 한번 눈을 돌려 보세요!
청년 실업, 저출산, 고령화 등 고질적이면서도 점점 커지는 사회 문제들이 우리 국가 발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정부도, 시장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사회 문제들을 지속 가능하게 해결하기 위한 대안 중 하나가 사회적 경제다.
사업적으로는 비합리적이지만, 사회적으로 현명한 사회적 경제는 따뜻한 경제다. 영리가 우선은 아니지만, 자력으로 돌아갈 만큼 채산성이 확보돼야 한다. 힘들지만 보람이 있고 '폼'도 난다. 물론 사회주의 경제와는 다르다. 그리고 자선사업도 아니다.
기업의 대주주로서, 소유 기업과 연대하여 새로운 해법 모델을 시험해 볼 수도 있다.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전략이 될 수 있다. 국내에서는 SK 그룹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올해 초에는 SK그룹의 사회적 가치 추구 경영이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과 스탠퍼드대에서 사례연구 주제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한 켤레의 신발을 팔면 다른 한 켤레를 제3세계의 어린이에게 기부하는 미국의 탐스 슈즈도 사회적 기업이다. 할리우드의 배우 등 저명인사들이 이 착한 구매에 동참하면서 유명해졌다.
2019년 아마존, 애플 등 미국을 대표하는 180여 개 기업의 대표들이 모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성명서를 냈다. '최우선 고려 대상을 주주로부터 이해관계자로 확대해서 포용적 번영을 이루자'라고 하면서, 이제는 기업의 목표가 주주의 이익만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역설적으로 미국 대선에서 부는 사회주의 바람을 차단하고 자유 경제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라고도 한다.
재벌의 자손이 선대 창업자와 다른 각도에서 국가 발전에 기여하는 그림은 아름답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자손도 복을 받는다는 게 역사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불적선지가 필유여앙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 : 좋은 일을 많이 한 집안은 자손에게 좋은 일이 있고, 좋지 못한 일을 많이 한 집안은 자손에게 재앙이 온다 : 주역 문언文言전
재벌이 자발적으로 개혁을 서두르지 않다가는 개혁을 당하고, 그 결과는 재벌 해체 후 공기업 전환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나라 공기업들의 초라한 성적표를 한번 보라, 업을 얼마나 지킬 수 있겠는가. 지키더라도 얼마 안 가 쏟아지는 '낙하산'에 파묻혀 질식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