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위로 말하면 우리말 오백 년도 못 간다
말을 꾸미거나 적당히 과장하는 건 전달과 설득을 위해 필요한 기술이다. 그러나 그 꾸밈이 지나치면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한다. 화장하는 것과 성형 수술하는 건 다르다. 우리말의 지나친 돌리기와 바꾸기가 말을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돌려 말하기
변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알아듣기는 하는데 무식하거나 웃기려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그나마 앞으로는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겠다. 변소가 화장실이 된 연유를 검색하면 대개는 '수세식이 되면서 세면대나 욕실이 같이 붙어 있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정확한 답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이 변소라는 직설적 표현을 피해서 만들어 낸 말이라는 게 정설이다. 변便의 우리말 풀이는 '똥이나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로 되어있다. '변소'도 또한 이미 한번 비껴간 말이다. 언제까지 똥을 피해 다닐 건가?
언론에서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바꾸어 말한 지 꽤 오래되었다. 안타까운 사건을 순화시켜 알리고자 함인 데 한두 번 정도 쓰고 말아야 할 꾸밈이다. 두 음절의 정확한 표현을 다섯 음절로 과대 포장해서 전달하느라 비용만 더 든다. 대중 매체에서 옮기기에 민망하다고 '강간'을 '성폭행'이라고 돌려 말해봐야 그 용어에 익숙해지는 순간 충격의 강도는 동일해진다. 동성애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따로 성소수자란 표현을 왜, 누가 사용하나? 지지자들인가 아니면 반대파인가? 이렇게 되면, 자살 말고는 어떤 끔찍한 행동의 결정에도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 친어머니와 장모가 한자리에 있을 때 한쪽을 부르려면 말로는 안되고 눈을 노려보든지 옆구리를 찌르든지 해야 할 것 같다. 잠시 편안하려고 에둘러 쓴 말이 말의 정보적 기능을 손상시킨다. 결국 손해 보는 장사다.
바꿔 말하기
서울대학병원, 세브란스 병원, 강남 성모병원, 삼성의료원, 현대아산 병원 따위는 서울에 있는 상급 대학 병원들이다. 이들 중 공식 명칭이 아닌 곳은? 세브란스 병원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다 틀렸다. 서울대학병원이 아니고 서울대학'교'병원이고, 강남 성모병원이 아니고 '서울'성모병원이란다. 아마 융통성 없이 고지식한 자동차 내비게이터로는 한 군데 빼고 못 찾아갈 거다. 우리는 사람 이름은 안 바꾸는데 기관 이름은 수시로 바꿔댄다. 서울대학교병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식 명칭, 통상명칭 해서 실속 없이 정보만 늘어난다.
지금 동대문 역사 공원 자리엔 '서울운동장'이 있었다. 1925년 개장하여 종합 경기장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다가 1985년 '동대문 운동장'으로 개명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시 잠실에 더 큰 운동장을 완공하면서 60년간 부르던 이름을 하루아침에 강탈당한 것이다. 서울운동장은 이름이 아니고 서울에서 제일 큰 운동장이었다는 말인가? 사람이었으면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수년 전 모 정당의 공약에 서울대를 세종시로 이전하는 안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서울대는 세종대로 바꿔야 한다.
정권 잡으면 행정부서 명칭 갈고 정권 뺏기면 정당 이름을 바꾼다. 2008년 행정자치부에서 개명한 행정안전부는 안전행정부로 바뀌었다가 다시 행정자치부 그리고 2017년 다시 행정안전부로 돌아왔다. 불과 10년 사이에 정부 행정부서의 이름이 무려 4번이나 왔다 갔다 하다 원위치되었다. 참 가볍다. 실제 조직의 변화에 부합하려고 그랬겠지만 정작 국민은 장관 청문회 때 한 번 들었을 새 이름을 기억이나 할까.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는 동안 일반 대중이 가지는 이미지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건 명칭 때문이 아니고 계속 분산 조정된 기관의 권한 때문일 것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구 시청사 이름은 몇 백 년 동안 로마인에서 유래한 '뢰머 Römer'다. 미국 항공모함에서 뜬 전투기는 공군이 아니고 해군 소속이다. 미 해군은 세계 최강의 항모전단을 운용하며 막강한 항공전력을 과시하게 되었지만 이름은 그냥 해군이다. 우리는 기능과 서열에 따라 이름을 지나치게 쉽게 바꾼다. 명칭이 내용을 다 포괄할 수도 없고 이름 짓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간판만 계속 갈아 끼는 게 누구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국민은 혼동할 뿐이다. 이게 다 거품이자 비용이다. 국정원을 다시 대외안보정보원인가 뭔가 바꾼다던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관련된 사람 빼고 신경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분명한 것은 십 년 안에 또 바뀔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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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다고 과거에 자기가 다닌 국민학교마저 아무렇지 않게 초등학교라고 부르는 민첩성에는 야박한 생각이 든다. 본질이 그대로 있는데 이름표로 가려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이름의 어원이나 유래가 바뀌었다고 이름을 고치다간 한이 없고 사용자만 힘들다. 한강 물이 흐려져도 청담동은 그대로이고 파리바게뜨에서 롤 케이크가 많이 팔린다고 체인점 이름을 '파리롤케이크'라고 바꾸지 않는다. 우직한 고유함에 가치를 두었으면 좋겠다.
옮기기 민망한 사실이라도 욕이 아닌 이상 피하지 말고 과감하게 전하자. 에둘러 말해봐야 듣는 사람만 혼란스럽고 순화된 효과는 그때뿐이다. 명시적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득이 우회 표현으로 얻는 일시 충격 완화의 이점 보다 크다. 말하는 이가 불편해서 돌려 말하면, 듣는 이는 짧은 순간이래도 그 말을 되돌려서 이해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한쪽은 암호로 바꿔 보내고 다른 한쪽은 해독해서 이해하는 작업은 보안이 필요한 상황에서만 필요하다. 물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 식히면 낭비가 된다. 상스럽고 거친 표현은 사회가 자연스럽게 정화한다. 언론은 자연스러운 언어의 변천을 강요해선 안된다.
조직의 개칭은 신중하게 결정하자. 철저하게, 소비자인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바꾸는 명분과 실리를 저울질해서 따져봐야 한다. 바꿈으로써 얻는 이익이 무언지, 그 이유가 국민들에게 설득이 될 건지, 불편함과 손실은 어느 정도인지, 무엇보다 바꾼 이름이 (국민들에 의해 ) 불릴 것 같은지 등등. 이름을 바꾸면서 갖다 버릴 간판, 폐지로 버릴 문서 양식은 국민들이 과거 10년간 바꾼 이름들을 가지고 헷갈릴 비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온 나라가 꾸미고, 부풀리고, 바꾸고, 거죽에 매달리고 있고, 인구당 성형수술 건수도 세계 1위라고 한다. 거죽은 거짓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사치가 된다.
회사후소 繪事後素 그림을 그릴 때는 좋은 바탕素을 먼저 마련하고 나서 색칠繪을 하라는 가르침
논어 팔일편
돌리고 바꾸고 뜯어고치는 동안 말 본디의 뜻이 실종되고 부정확해진다. 말이 부정확하면 전달력이 약해진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 말이 많아지고 산만해진다. 말 하기가 불편해진다.
불편하면 말하기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