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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11. 2020

정치인들도
근본은 괜찮은 사람들이다.

직업별 신뢰도를 조사하면 어느 나라나 정치인이 꼴찌를 차지하고 직장을 기준으로 하면 국회가 그렇다. 이제는 별로 놀라운 통계도 아니다. 멀쩡하게 존경을 받던 사람도 일단 정치판에 뛰어들면 망신당하기 일쑤다. 못 믿을 사람들이 유난히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경쟁력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국민이 설마 부정직한 사람들만 골라서 국회로 보냈을 리 없다. 앞뒤가 안 맞는다.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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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행사해야 한다. 다른 직업에서도 권한이 성취동기가 되는 것은 같다. 일반 직장인은 노력과 역량의 대가로 연봉과 함께 직급이 올라가고 권한은 직급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국가 권력과 조직 권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권력은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으로 정의하고 있다. 국가 권력은 국민이 위임한 폭력도 포함한다. 한편 권한은 보통 조직이나 개인에게 위임된 권리의 한계를 뜻한다. 권력(權 power)은 힘이고 권한 (權 authority)은 한계다. 




지배욕은 인간 본능 중의 하나이며 그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봉건사회에서는 신분제를 통하여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을 가르고,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을 나눠 가짐으로써 지배 본능을 충족시켰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신분제 대신에 정치행위를 통하여 권력을 획득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대개 권력 획득의 명분을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기 위함으로 내세운다. 안 그러면 권력이라는 위험한 물건을 국민이 쉽게 맡기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기와 결과적인 공헌은 다르다. 설사 정계 진출에 이타적인 뜻이 있더라도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본능이 배제된 몰 개인적인 동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인은 지배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를 봉사와 희생으로 미화시킨다. 마치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 성행위를 한다는 것과 같다. 회사원이 야근을 하면서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고 하면 농담이 된다. 정치만큼 뻔한 속마음을 거창하게 돌려 말해야 하는 직업도 없다. 여기에서 불신이 출발한다.


공직자, 군인, 학자, 기업가, 운동선수할 것 없이 사회 각 분야에서 성공한 이들은 대부분 극심한 경쟁을 거쳐 살아남았다. 자기 실력을 부단히 키워서 남들을 이김으로써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 자리에 이르렀다. 속마음으로는 경쟁자를 욕하고 안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자제한다. 


정치인들도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을 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경쟁에서 상대적 우위를 달성하는 과정이 다른 직종과 좀 다르다. 정치인만큼 내놓고 자기 자랑을 하고 대놓고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직업은 거의 없다. 어떻게 보면 가장 솔직하고 직관적으로 행동하는 집단이다. 누가 정치를 하던 대동소이 하다. 정치판에서는 공개적으로 남을 헐뜯어서 자기를 내세우는 네거티브가 효율적인 전략 (특히 선거판에서는)으로 애용된다. 


물고 물리는 정치 아수라장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질기다고 하는 연줄도 소용없다. 같은 서울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 사법연수원을 나와 검찰청/법원을 거쳐 국회에서 다시 만난, 대학교 · 학과 ·고시 · 연수원 · 첫 직장 · 두 번째 직장까지 일치하는 참으로 기이한 인연의 동기 선후배들이 서로 죽으라고 헐뜯고 아예 감옥에까지 처넣는다. 언론은 이 재미있는 볼거리를 놓치지 않고 자극적인 용어를 동원해서 유권자들에게 실황을 중계한다. 특히 대중성 있는 네거티브 내용은 각색하여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여주며 정치와 언론의 협업이 이루어진다.


관련된 인사들의 사악한 원형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정치구조에서 어떻게 국민들이 정치인들을 칭찬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사람이 아니고 구조와 문화다. 그런데 정치 선·후진국에 따라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의 정도가 좀 다르다. 일단, 정적과 싸우는 것이 정치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불가피한 정치활동의 일부라고 인정을 해주자. '말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서로를 이기려고 하는 싸움'에 있어서도 어른 싸움과  애들 싸움은 차이가 있다. 비교를 한번 해보자. 


어른은 상대방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은 참는다. 신중한 워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같은 잘못이 반복되면 벼르다가 행동에 들어간다. 일단 행동하면 위력이 크고 묵직하다. 돌이킬 수 없는 대형 사고로 이어져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따라서 관계 회복에 시간이 걸리고 아예 회복 불가한 경우도 있다( 평생 원수지간..). 교활하다. 그렇지만 싸움을 통해서 문제가 하나 둘 해결된다. 


이에 비해 


아이들은 사소한 걸 못 참고 그때그때 즉각 응수한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데 유치하고 원색적이다. 대개의 경우 한쪽이 울거나 코피가 나면서 상황이 끝난다. 충돌 횟수는 많아도 단위 당 충격이 경미하다. 금방 잊어버린다.  시끄럽다. 


우리나라 정치가 둘 중 애들 쌈에 가깝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주 발끈하며 즉흥적으로 고성의 저급한 언어를 교환한다. 말은 자주 꼬이고 내용은 별게 없다. 물리적 행동까지 발전하지만 호흡이 짧아 금방 없던 일이 된다. 언론은 볼거리가 많은 애들 싸움식의 자극적인 정치 패턴을 좋아한다. 기사 작성도 훨씬 편하다. 그걸 보는 국민도 아이들 수준에 머문다. 그래도 애들 싸움보다는 어른 싸움 방식이 바람직하다. 그게 정치 발전이다.




우리나라의 후진적인 정치문화가 정치 불신을 부채질하고 있다. 정치 불신은 정치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정치의 의 수준이 퇴보하는 악순환을 겪는다.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정치적 결정들이 흥행, 관전 포인트 같은 자조적인 표현으로 희화화되고 있다. 짧은 정치 역사로만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치 당사자들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어서 이미 2012년에 정치 선진화 법을 의결했으나 달라진 게 없다. 법이 문화를 견인하지 못하지 못한 사례다. 문화를 법에 의존하는 것은 미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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