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무백 문효 자왈 부모 유기질지우 孟武伯 問孝 子曰 父母 唯其疾之憂
논어 위정편 6
노나라의 실력자인 맹무백孟武伯이 효孝에 대해 물으니 공자孔子는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제자들이 물었을 때는 공경심이라든지, 편안한 얼굴을 하라는 등 자식이 주체가 돼서 해야 할 덕목들을 효라고 답했다. 이번에 공자는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아픈 게 제일 큰 걱정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뭐 해 줄 생각 말고 제발 걱정이나 끼치지 말라는 얘기다. 효의 사전적 의미는 '부모를 봉양하고 마음 편히 모시는 일' (네이버/고려대 한국어 대사전)이다. 편함의 시작은 걱정이 없는 마음이고, 부모 걱정 중에서 자식의 안위安危보다 더한 것은 없다.
애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의 잦은 병치레에 곤욕을 치른다. 직장에 출근했다가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은 애 엄마의 얼굴은 금세 핼쑥해진다. 고꾸라질 듯 집으로 향하는 마음은 걱정, 죄책감 그리고 출장 간 남편에 대한 원망까지 겹쳐 복잡하다. 이렇게 시작한 자식 걱정이 평생을 간다. 아이가 장성하고 이제는 당신 자신이 환자가 되어서도 그 걱정엔 임무 교대가 없고 오히려 손자 세대까지 대상이 확대된다.
구십이 넘은 나의 엄마는 수시로 현관의 신발들을 점검하신다. 늙은 아들의 위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일단 재택 여부를 확인하는 순서인데 며느리와 손주까지 거기에 포함된다. 어떤 내 친구는 어머니와 같은 아파트의 다른 층에 사는데 저녁때만 되면 어머니가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셔서 차량들을 '사열' 하신다고 한다. 역시 아들이 들어왔나 챙기시는 거다. 늙은 자식 몰래 확인하고 조용히 맘들을 놓으신다.
부모는 밖에 나가 있는 자식이 불안하다. 자식의 나이와는 무관하고, 외출의 기간과 거리에 따라 걱정의 크기가 비례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걱정에서 열외가 되기는커녕 걱정은 평생 직업이 되어간다. 자식에 대한 걱정이 무조건적이고 단순하다는 사실은 자식을 잃은 어미가 '불쌍한 내 새끼' 하면서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 확인된다. 남편을 보낸 아내가 '나는 어떡하라고' 하며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는 절규와는 주어부터 다르다.
자왈 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멀리 놀러가지 말라. 놀러갈 때는 반드시 갈 곳을 정해야 한다.
논어 이인里仁 편 / 낭송논어(김수경외)
논어에는 효와 관련된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죄책감에서 나는 그 구절들을 외면하고 피해 다니게 된다. 이 시대의 효는 한물간 사상이 되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 부모를 모시던 정성은 이제 유턴해서 자식의 양육으로 집중된다. 대신에 부모 봉양은 요양기관이나 국가 안전망에 의존하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자식에 의한 부양은 이미 포기했다는 선언으로 부모에게 소홀한 미안함을 상쇄하려고 한다. 혹자는 자기의 경제적 가치 (=시급)를 고려할 때 직접 돌보는 것보다 외부에 맡기는 게 합리적이라는 영악한 변명도 곁들인다.
전통사회에서 효를 사람됨의 근본으로 강조한 (논어 학이 편 2) 배경을 부모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만 이해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게 바로 정치하는 것과 같다는 (논어 위정 편 21) 공자의 주장이, 혹시 사회가 작동하는 근본 원리로서 효의 기능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효의 실천을 외주로 돌리는 요즘의 세태는 미래의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궁금하다.